큰오빠 1 지은이:박정근 출판사:우리문학사 작가의 말 오래 전부터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뭔가 말하지 않고 그냥 가슴속에 묻어 두기엔 너무 버 거웠기 때문이다. 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열병을 앓으며 쓴 이 글은, 단지 쓰기 위한 몸부림만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요즘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나 역시 그 속에 파묻혀 고뇌하던 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 타인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 남지 못하는 이 시대에, 모든 것은 경제 탓으로 돌려지고, 그 외의 것은 단지 겉치장에 불과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허섭쓰레기가 되 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작정 펜을 들고서 우리의 가슴을 이욕과 금전으로 사무치게 해 버린, 그 냉매와의 지난 한 싸움을 시작했지만, 나 또한 턱없이 부족한 자신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사회의 그 어떤 악순환도 우리의 가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국가의 경제 위기라 는 기이 현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갈 큰오빠의 위대함과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내 가족이 있기에 가야 할 길을 안심하고 갈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가족의 따뜻한 사랑, 친구와의 뜨거운 우정과 의리, 여인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 꿈과 야망에 앞선 가족애, 그리고 한 인간의 좌절과 집념, 눈물과 승리를 우리 가족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우리들이 가장 잊기 쉬운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 다. 이 글은 핵가족의 서투른 모순을, 관심과 사랑이라는 대가족의 기둥에서부터 되찾는 것이 다. 잃어버린 우리들의 가족애를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 라고나 할까? 자신에게 주어진 탄탄 대로의 길과 안정마저도 가족을 향한 사랑 앞에선 유약할 수밖에 없다는 내면의 본능을 말하고자 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이고, 희망이 며 이상일 것이라 생각함은 과연 나의 생각뿐일까? 사회 구석구석에 큰오빠의 땀과 웃음, 그리고 든든한 큰오빠의 어깨가 있었기에 가족은 존재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큰오빠의 자리를 이 글을 통해서나마 조금이라 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막내 여동생을 통해 바라본 큰오빠의 감동 어린 발자국들을 좇아가며, 이 글이 한낱 경주 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로 독자들께 다가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독자 여러분의 사랑과 질타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이 시대에 꿈을 안고 사는 모든 오빠들과 대학원 법학과 시절 은사이신 신창선 법학 박사 님께 감사를 드린다. 1998년 가을 박정근 봄을 타고 온 희소식 11톤 트럭 아홉 대가 잔먼지를 일으키며 읍내 사거리를 향해 달려온다. 집채만한 차가 하 나둘씩 줄지어 지나칠 때마다 큰 몸짓에 눌린 사방의 풍경들이 바르르 떨며 부산해진다. 학교로 향하던 아이들이 줄을 맞추어 트럭 떼를 피해 담으로 바짝 붙어 서서 빼꼼히 고개 를 내밀었다. 차들이 공장 쪽으로 꼬리를 물며 사라지자 아이들은 잠시 멈칫했던 발걸음을 총총히 옮기며 내기라도 한 듯 학교로 달음질친다. 선두 차가 '바다 농산물'로 핸들을 꺾는다. 대열에 늘어선 차들이 한 공장 안으로 제자리 를 찾아 들어가고, 그 옆으로는 하역장 처마 밑에 또 다른 트럭들이 준비되어 있다. 트럭을 감산 플래카드는 바람에 날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연상케 했다. 트럭들이 들어서자마자 하역장 귀퉁이에 있던 1톤 봉고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트럭 앞으로 두어 사람씩 짝을 지어 다가서며, 트럭 운전사와 몇 마디 인사 를 나누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격려라도 해 주는 듯했다.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가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 선이 집중됐다. 남자는 아이보리색 점퍼에 밤색 면바지를 입었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주름이 패인, 오십대 중반의 공장장이었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여직원은 어깨에 맸던 노트북을 펼치며, 장부를 정리할 준 비를 하고 있다. 공장장은 잽싸게 번갈아 가며 봉고차와 트럭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창 고 스탠드로 올라서서 오른손을 치켜들며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아 큐 사인을 해 보였 다. 그렇게 사인을 보내는 그의 표정은 조금은 거만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로 시종일관했다. 사인이 떨어지자 하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서른 남짓의 장정들이 날다람쥐처럼 트럭에서 봉고차로 포장 박스를 들쳐 메고 그 사이를 시원시원하게 넘나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에는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고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야속하게도 하역장 처마 아래로는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짐을 부리는 노역자들만 땀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역이 시작되면서부터 쉴새없이 물량 을 접수하고 확인하는 공장장과 한쪽에서 물량을 기입하는 여직원도 키보드를 눌러 대느라 정신이 없어 땀에 젖어 있었다. 여직원은 기입을 잘못했는지 양미간을 찌푸리며 입력한 자료 일부분을 삭제하고 있었다. 공장장이 잠시 지켜보다가 다가와서 물었다. "아따, 어디 잘못된 거라도 있나 부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쪼금 전에 물품 내역서를 잘못 기입혀 부렀어라. 캔하고 드링크하 고 바꿔서 체크하는 바람에 그랬느디 다시 고칠라요. 죄송혀라." "무슨, 죄송할 게 있남. 이렇게 한 번씩 하역하고 나면 나도 혼이 쏙 빠지는디, 그렇게 서 서 일일이 체크혀야 하는 김 양은 얼마나 정신 없겄는가. 너무 서둘러서 하지 말고 막히는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제?" "예, 공장장님. 잘 알았구만요." 금방이라도 혼쭐을 낼 것 같았던 공장장의 온화한 말투에, 토끼 눈을 했던 여직원은 히죽 웃으며 작업을 계속했다. 물량들이 제법 봉고차에 실렸는지, 봉고차 밖으로 삐죽이 박스 측면이 드러났다. 공장장은 오늘도 가득 채워진 박스들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람이 불자 얼마 없는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짐을 부리던 장정들도 잠시 서서 바람 을 쐬며 모두 휴식을 취했다. 구릿빛으로 이글거리는 활기찬 얼굴들에는 밝은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봉고차보다 더 진한 파란 잉크빛으로 '바다 장수'라고 씌어진 로고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 역을 시작한 지 40여 분이 경과했다. 박스들로 가득 채워진 봉고차의 운전사들이 공장장 앞으로 달려와 적재 물량 보고를 마치 고 인사를 건넨 다음, 공장 입구를 지나 차를 몰았다. 공장장은 회사 정문을 빠져나가는 50대의 차량을 끝까지 지켜보며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 다. 그러고는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공장장은 본사 건물로 발길을 옮기려다 말고 흰색 중형차가 하역장 앞을 지나쳐 건물로 들어서자, 차가 자신을 비켜 지나칠 때까지 목례를 한다.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투명한 은빛처럼 반짝였다. 차는 매끄럽게 보도 위를 달리다가 하역장 맞은편 5층 콘크리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차 가 정차하기가 무섭게 건물 현관문을 열고 정장 차림을 한 말쑥한 사내들이 달려와 차 문을 열었다.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뒷좌석에서 내렸다. 젊은 여자는 배웅을 나왔던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 뒤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이십대에서부터 오십대까 지의 직원들과 함께 회사 로비로 들어서는 여자의 모습이, 그녀의 새까만 머릿결만큼이나 강해 보였다. 여자가 로비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 무리 지어 흩어져 있던 20여 명 정도의 직원들이 일 제히 여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 역시 가벼운 목례를 한 다음 계단을 올라섰 다. 그녀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로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고는 여기저기서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서류들을 뒤적이며 삼삼오오 모여 얘기들을 하느라 정 신이 없었다. 모두 아침 조회를 기다리는 직원들이었다. 그리 큰 안건은 없었지만 요즘 신상 품의 시판을 앞두고 회사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로비에서 짝을 지어 있는 무리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젊은 평사원들이었지만, 로비 안은 그들의 젊은 패기로 가득 찼다. 물량 조사를 끝낸 여직원이 자료를 복사하여 2층에서 급히 내려오자 시끌벅적하던 로비가 잠시 잠잠해졌다. 자료를 다 돌린 여직원은 잠시 조용해진 틈을 이용해 입을 열었다. "지금 나간 건의안 중에 한 가지 시정할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페이지 상단에 있는 드 링크 제품 중 65밀리리터를 75밀리리터로 수정해 주시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여직원은 힘주어 말했지만 누구 하나 관심 있게 듣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대수롭지 않 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단발머리 여자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3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서너 평 남짓 되는 사무실은 그녀의 단정한 옷차림만큼이나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기 전에 응접 세트 쪽으로 다가서서 멀거니 자신의 자리를 한 번 바라보 았다.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대표 이승주'라는 검은 명패를 은은하게 타고 흘렀다. 그렇게 흐른 아침 햇살은 응접 세트가 놓인 카펫위로 빗살 모양을 이루며 켜켜이 내려앉았고, 붉은 카펫에는 그 어느 때보다 보드라운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댄 그녀는 완연한 봄 때문인지 나른해지면서, 쉬이 피곤함을 느꼈다. 이른 새벽부터 하역 작업과 공장 가동 등으로 부산했던 직원들에 비하면 그녀의 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 뜨며 벽면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어린 목동 이 풀피리를 불며 꼴을 먹이는 수채화였다. 몇 년 전 승주의 사장 취임을 축하하면서 제일 절친했던 대학 동기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녀의 대학 동기들 대부분이 식품 회사나 연구소에 취직해서, 승주와 같은 계통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지고 보면 그녀가 들어선 이 길 역시 전공과 같은 분야라 별다른 어 려움은 없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승주는 문 쪽으로 다가가 왼쪽 벽에 세워진 바다 농산물이란 사기 를 매만지고는, 엔진 소리가 계속 들려 오는 하역장을 내다보기 위해 창 쪽으로 발길을 옮 겼다. 그녀는 비스듬히 쳐진 블라인드를 걷으며 여전히 부산한 하역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엇 을 생각하는지 멍한 표정으로 마냥 하역장을 바라보며 그 곳에서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하역장에서 앞차와 뒤차간의 간단한 접촉 사고로 경적이 울리자 최면에서 깨어난 듯 승주 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몇 개의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대부분이 신상품에 관한 건의서와 의견 조정안, 그리고 공장 운영에 관한 재정 결재 서류들이었다. 10여 분 동안 서류들을 쭉 훑어본 승주는 차례로 사인을 해 나갔다. 천장 모서리에 부착 된 스피커에서 요한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가 잔잔히 흘러 나왔다. 승주는 가만히 그 멜로 디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후 분위기를 개는 카랑카랑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과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는 즐거운 하루가 되십시오. 아, 그리고 오늘 10시 정각 간부 회의가 있으니 그 때까지 하역 작업을 완료해 주시기 바랍 니다. 이상 바다 농산물 경리과였습니다." 방송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승주는 회전 의자에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서류철 에 사인을 했다. 아침 업무를 대강 마무리한 승주는 벽시계를 보았다. 간부회의가 시작되기 10분전이었다. 그녀가 시계에서 시선을 거두기도 전에 인터폰이 울렸다. "사장님, 장 상무님께서 지금 하역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회의 준비가 끝 났으니 곧바로 회의를 속행했으면 하십니다." "예, 알겠어요. 곧 내려갈게요." 승주는 몇 개의 서류를 들고 비서실을 지나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만 이 양벽 사이에서 깊게 반향되어 울릴 뿐 업무가 시작된 후라 한산했다. 2층 계단으로 내려 설 때, 복도 중간쯤에서 전화벨이 집요하게 울린 것 외에는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 다. 층계를 내려서는 승주의 모습이 보이자 다소 술렁이던 회의실이 잠잠해지면서 그 곳에 모 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승주에게로 모아졌다. 승주는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 다. 그러고는 총무과 여직원이 가져온 음료수를 살짝 입에 대며 장 상무를 바라보았다. 장 상무는 승주의 의중을 헤아렸는지 뒤쪽에 앉아 있는 김 과장에게 손짓으로 회의를 시작할 것을 알렸다. 상무의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 과장은 재빠르게 서류 바인더를 들고 일어섰다. "생산부 김형민 과장입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김 과장은 아침에 하역 작업이 끝난 물량 통계와 당월 출고될 목록을 장 상무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달에 출고될 물량입니다." 서류를 내민 김 과장은 한 걸음 물러서며 머리를 숙였다. "그래요, 수고했소." 서류를 훑어본 장 상무가 이마에 두 겹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얼굴 표 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김 과장, 이게 뭡니까? 이건 기존 상품 아니오?" 장 상무는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상무님." 김 과장은 갑작스런 장 상무의 큰 소리에 온몸이 굳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장 상무는 말 끔히 면도된 푸릇한 턱을 만지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신상품 출고량은 어떻게 된 거요?" 가벼운 추궁이 떨어지자 김 과장은 시선을 공장장에게 돌렸다. 이를 대강 눈치챈 공장장 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를 쳤다. 안전모를 벗은 공장장은 앞머리가 대머리였다. 그는 습관 처럼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보고를 시작했다. "제가 먼저 신상품 출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 상무는 공장장의 말을 가로챈 뒤 갖고 있던 서류 몇 장을 구기듯이 넘겼다. "공장장, 출하량부터 보고하시오." 장 상무의 냉랭한 목소리에 공장장도 부동 자세를 취했다. "그럼 먼저 출하량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구기자즙 800박스, 구기자 캔 200밀리리터 1천 박스, 구기자 사탕 300그램 1만 박스, 구기자 드링크 75밀리리터 5천 박스 등 도합 출고 도 매가로 1억 3천만 원입니다." 공장장의 신상품 출햐량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장 상무가 일어서며 다음 안건을 말했다. "다음은 상품명 공모 확정 부문에 대해 논의할 것이니 부서별로 기획안들을 말하시오." 이 때 싸늘한 정적이라도 깨려는 듯 인터폰이 울렸다. "사장님, 한국 식품 개발 연구소 전화입니다." 승주는 오른손에 들었던 검은색 펜을 급하게 왼손으로 바꾸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승주입니다." "이 사장님, 축하드려요." 낮은 톤의 굵직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 편에서 들려 왔다. "김 박사님, 그러면......." "그래요, 이 사장. 아주 성공적이에요. 오늘 아침에 최종 결과가 나왔는데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바다 농산물이 이제 밖으로 알려지는 일 밖에 남지 않았군요. 이 사장님 이 대표로 있는데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거, 나중에 구기 자로 환영 파티 근사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승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회의실에 있던 간부들의 얼굴에도 일제히 회색이 감돌았다. "제품 성질에 대한 합격필증을 우송할 테니, 디자인에 조금만 신경 써서 출하하면 반응이 좋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저희 연구팀도 뿌듯하답니다." "그럼 , 향후에 찾아 뵙겠습니다." "뭘요, 그럼 수고하세요." 김 박사와 통화를 마친 승주는 펜을 꽉 쥐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장 상무도 따라 일어섰다. 승주가 무엇인가 말하기를 고대하는 눈빛으로 그 녀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신상품이 합격필 했답니까?" 장 상무가 대략 눈치를 채고 간부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그 동안 고생들 많았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해 준 여러분 덕분입니다." 승주 옆에 앉았던 총무과 여직원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사장님,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승주가 여직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모두들 고생 많았습니다. 너무 기다리던 소식이라 저 역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무리인 줄 알지만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고, 각 부서별로 따로 장 상무님께 결재 받았으면 합니다." 장 상무는 승주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다음 변경 사항은 따로 사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장 상무님, 저는 광고 때문에 서울에 다녀와야겠어요. 지난번에 제가 따로 부탁 드린 거, 이제 진행하셔야 되겠습니다." "네, 사장님.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신상품이 지역 발전에 중요한 부분이니 만큼 광고를 전문회사에 직접 맡겨 제품의 이미 지를 잘 살려야 합니다. 장 상무님, 제 방으로 잠깐 올라오도록 하세요." 승주와 장 상무가 회의실을 나가자, 벌써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직원들이 로비로 나와 그 간 밤샘하며 고생했던 결실의 기쁨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바다 농산물 직원 중 3분의 2가량은 회사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3분의 1은 연구와 공장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오늘 한국 식품 개발 연구소에서 합격필증을 받았다는 소식은 연 구소와 공장 팀 직원들에게 더 없는 기쁨이었다. 직원들은 저마다 얼굴에 홍조를 띠며 저녁 회식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사무실로 흩어졌다. 현관 앞으로 매끈한 광택의 흰색 그랜저가 들어서자 승주와 장 상무를 비롯한 중견 간부 들이 얘기를 나누며 차 쪽으로 다가섰다. "광고 자료, 다 챙겼죠?" "네, 사장님. 여기에 신상품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나중에 더 필요한 자료가 생기면 바로 팩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장 상무는 서류철을 승주에게 내밀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서류철을 받아 든 승주 또한 직원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들어가서 이들 하세요. 서울에 도착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승주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젊은 운전사가 뒷문을 열자 몸을 실었다. 운전사는 습관처 럼 먼저 뒷문을 닫고서야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꺼라?" "집으로 가자." "얼레, 벌써 집으로 들어가 분당가요?" "그래, 서울 갈 준비를 해야 하거든."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승용차는 유연하게 사옥을 빠져나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녘은 어쩌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저 작은 풀들 사이에도 초록빛 물결이 인다는 것이 새삼스레 승주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벽파진 의 바다도 잔잔하게 수평선을 드리웠다. 한참 동안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던 승주에게 운전사가 물었다. "갑자기 서울에는 왜 올라가신다요?" 승주는 듣지 못했는지 시선을 창밖에 둔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운전사는 픽 웃으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잠시 후 승주가 창가에 기댔던 머리를 바로 하며 물었다. "오늘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데, 가능하겠지?" "예, 저야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라." "아니, 피곤하지 않겠느냐구. 여기서 서울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잖아. 힘들 것 같으면 고속버스로 올라가려고." "전 괜찮은디, 무슨 일로 갑자기 서울은 올라가신다요?" 그는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서울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 올려 보낸 식품 샘플이 합격필증을 받아서 시판할 수 있게 되었대. 제품이야 이젠 만들기만 하면 되고, 무엇보다 시중에 내놓는 일이 중요하잖아.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광고를 만들어 제품에 대한 홍보를 해야지. 우선 농산물 특화 차원에서 가장 효과적인 광고 기획이 필요한데 서울에 있는 광고 회사에 맡길 참이 야." "축하드려라. 하시는 일이 다 잘 될 거구만요, 사장님." "승진아, 너랑 나랑 있을 때는 누나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리고 너도 이젠 사투리 좀 그만 쓰면 안 되겠어? 집에서 어른들과 얘기할 때는 몰라도 말이야. 너도 회사의 중요한 일에 참 여하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 두어야지." "예, 누님, 알았어라." 승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새 차는 운림산방 밑을 지나고 있었 다. 승주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벌써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2년 전에 새로 지은 승주의 집은 여느 시골집과는 다른 2층 양옥집이다. 집 앞에 서면 시 원스레 큰 나무 대문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차가 들어서자 백구가 제 일 먼저 차 옆으로 달려와 반가움을 표시했다. 승주네 집에서 백구는 남다른 존재이다. 백구가 종족을 이뤄 식구들과 함께 한 지 벌써 50여 해를 넘은 것이다. 가족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언제나 집안에서 예쁜 짓만 골라 하는 백구는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백구를 곁에 둠으로 해서 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었고, 백구 역시 가족 모두를 끔찍이 따랐다. 백구는 할머니가 친정에서 데려와 기르게 된 것이다. 지금의 백구도 그 때 백구가 낳은 무리 중 한 마리이다. 어느 날엔가 마실 나가셨던 할머니가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자 백구는 저 녁나절 온 동네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을 어귀를 급히 횡단하는 오토바이에 치였다. 오토바이를 탔던 사내는 쓰러진 백구를 보고 놀라 도망가려고 급히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사내는 정신을 가다듬고 힘없이 쓰러져 있는 백구를 보고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백 구를 안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을 한 사내는 다시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고 승주 집을 향해 달렸다. 낯선 사내가 백구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김제 댁이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이게 무슨 몹쓸 일이단께. 성님 좀 나와 보쇼이." 할머니도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승주네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다름 아닌 할머니가 가 장 아끼시던 백구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으니 말이다. 낯선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혀서 어쩔거라. 제 볼 일에 급혀서 이 개가 앞에서 오는 것도 못 보고 지가 그 만......" "이 일을 어쩐다냐. 백구 왼쪽 다리에서 피가 많이 나 부렀어. 할머니 보시면 속상혀하실 것이구만, 참말로....... 엄니는 어디 가셨길래 시방꺼정 들어오시지 않는다냐. 애간장 타 죽겄 네." 어머니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넋두리를 계속했고 사내는 쭈뼛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사내는 다친 백구를 보고, 놀라 걱정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몹쓸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됐다며 사내를 돌려보냈다. 안절부절못하는 식구들은 모두 목청 높여 할머니를 부르며 몇 번씩이나 마을을 샅샅이 뒤 졌다. 할머니는 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길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계셨 던 것이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식구들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들 손에 잡혀 느릿느릿 걸어오시는 할머니는 다섯 살 난 여아 같았다. 몸도 쇠하셔서 편치 못하신 분이 밤늦도록 돌아오시지 않으니 식구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러나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모두 할말을 잃었다. 어쨌든 아들의 손을 잡고 잔걸음으로 걸 어오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연세가 많아 이제는 자식에게 기댈 수밖 에 없는 할머니, 누구도 할머니에게 백구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할머니도 참, 성가신 일이 생겨 부렀는디 이제 오셔라. 백구가 난리가 아녀라. 식구들이 얼마나 애태우며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눈이 빠져 불 뻔했단께라." 김제 댁이 할머니를 오른쪽에서 부축하고 현관으로 모시고 들어가며 말했다. "동네 마실도 가고 밭에도 한 번 나가 보고 온 것인디 어째들 그런다냐. 그란데 먼 일이 생겨 부렀길래 늙은이를 기다린 것이여?" "할머니, 백구가 다쳤어요." 승주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갸가, 왜?" "할머니 걱정돼서 갸가 저녁도 안 먹고 동네방네 찾아 나선 것이어라." 김제 댁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근데 어디가 안 좋은디? 멀 잘못 묵은 거여?" "할머니 찾으러 백구가 혼자 나갔다가 오토바이에 다리를 치지 않았겄소." "머라고? 아이고 내 새끼, 백구 어디 있다냐? 많이 아픈 거여, 어딨어?" 할머니가 연거푸 백구를 찾으셨다. 잠시 김제 댁과 나눈 몇 마디에도 할머니의 안색이 어 두워졌다. "할머니, 사랑채 부엌문간에 쉬도록 놓아두었어요." 승주는 왼쪽 다리에 흰 붕대가 빽빽히 감긴 백구를 안고 할머니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 갔다. 끙끙거리며 맥이 풀린 백구는 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고, 백구는 제 몸을 만 질 때마다 아픈 내색을 했다. "야가 어디서 이랬다냐. 누가 우리 강아지를 요렇게 시리도록 맨들어 부렀다냐?" 할머니는 백구를 안고 놓을 줄을 모르셨다. 그런 할머니를 지켜보는 아버지는 담배 한 개 비를 물고 멀리 하늘만 바라보았다. "엄니, 괜찮을 것이오. 걱정 마셔라." 할머니 품에 안긴 백구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가 다시 맑아지곤 했다. 백구는 그 날 이후로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아져 예전처럼 잘 걷지 못했지만 밝은 모습은 여전했다. 마당 한켠 텃밭에서 밭일을 하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동차 엔 진 소리를 듣고 사랑채에 딸린 부엌에서 김제 댁이 나오면서 언제나 떠날 줄 모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워메, 우리 아들이 출근한 지 3시간도 안 되야서 벌써 퇴근 허네 그려." "회사 일이 잘 돼서 서울 올라갈라고 일찍 왔어라." "먼 일이 그리 잘 되야서 서울꺼정 올라간다냐? 김제 댁은 좋은 일인 것은 같으나 무슨 일 때문에 경사가 난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 로 우물가에서 손을 씻는 어머니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성님, 회사에 아주 존 일 있다고 안 혀요." "무슨 일이 있단가?" 어머니가 하던 밭일을 멈추고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으며 승주에게 물었다. "먼 존 이이 있어서 서울엘 간다냐?" 현관으로 들어서던 승주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신발을 벗고 마루에 널려 있던 제 옷가지들을 챙기고 있었다. "엄마, 서둘러 서울 갈 준비 좀 해 주세요." "그란디 먼 일로 갑자기 서울이냐?" "네, 이번에 개발한 신상품이 오늘 합격필증을 받았지 뭐예요. 광고 문제로 가려던 참이에 요. 엄청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아시면 돼요." 어머니는 머리를 싸맨 수건을 벗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라믄 가는 길에 광주 병원에 들러서 니 언니 좀 만나고 가거라. 거리도 지척인디 맘이 다 내 맘 같지 않으닝께. 환자 몸으로 어떻게 몸조리나 잘 허고 있는지......." 어머니가 말끝을 흐리며 슬쩍 눈시울을 적시고 만다. 딸이라고 출가시켜 놓고 마음이 꽤 나 불편했을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 한 데다 잔병치레를 많이 한 딸이라 민주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어떻게 해도 감출 수가 없 었다. 다섯 자식 중에서도 유독 몸이 건강하지 못해 고사리손 대부터 근방의 유명한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서 웬만한 명의들도 큰딸 민주만큼은 곧잘 기억했다. 그 동안 속 끓이며 고 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쪽이 저린 남산 댁이었다. "엄마도 참......, 됐어요. 그 새 눈이 벌개지시잖아요. 제가 꼭 들러서 언니 만나 보고 전화 할게요." 그녀는 2층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서랍을 열었다. 등본을 찾던 승주는 아랫서랍 을 뒤지다가 누렇게 빛바랜 상장 무더기들을 발견했다. 몇 장을 뒤적거리던 승주는 고등 학 교 때 문예 대회에서 받은 상장을 발견하고 한참을 뭔가 회상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등 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진도에 내려와 있으면서 하루는 우연히 큰오빠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일기장을 소재로 쓴 글이 문예대회에서 입선했다. 당시 승주에게는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큰오빠 경주의 얘기가 알려졌다는 게 더 기뻤다. 오빠의 일기장은 승주에게 있어 무엇보다 특별한 보물이었다. 승주는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승주의 대학 졸업식 때 큰오빠와 찍 은 사진이었다. 어느 새 6년이란 세월의 두께를 쓰고 조그만 토템 인형처럼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서 쳐다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콤한 추억에라도 젖은 듯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승주는 액자에 뿌옇게 앉은 먼지를 손끝으로 살며시 닦아 낸 다음 바짝 앞으로 당겼다. 짧은 오빠의 머리 모양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오빠는 언제나 짧은 머리였다. 막 군대를 제 대한 사람처럼 짧게 깎은 머리는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어려 보였다. 승주는 먼지가 다 닦였음에도 다시 한 번 문지르고는 책상 끄트머리로 액자를 옮겨 놓았 다. 그러고 나서 좀 전에 뒤적였던 큰오빠의 일기장을 다시 들었다. 무미건조한 종이 뭉치임 에도 승주에겐 마치 곁에선 숨쉬는 것처럼, 그 호흡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숨결, 정열적이지만 결코 독선적이지 않으면서도 냉정하지 않은 예리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 큰오빠에 대한 승주의 느낌이다. 막내라서 언제나 큰오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자신 또한 지금에 와서 큰오빠를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 일 처리를 할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에 그녀는 매번 이렇게 생각했다. '큰오빠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승주를 답답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도무지 자기 식의 독단적 사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하겠지만 승주는 그런 나무람이라면 기 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만큼 큰오빠 경주를 신뢰했던 것이다. 승주는 일기 장 한가운데를 펴 들었다. 19 년 6월 15일 서울에 올라온 지도 벌써 3개월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쯤 들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겠지? 녀석들은 모두 잘 있는지 궁금하다. 광주로 나간 미자도 모두 하나같이 그리움투성이다. 고향을 떠나게 되면 다 이렇게 향수에 젖는 걸까? 하지만 고향을 생각할수록 나는 강해짐 을 느낀다. 나에게 고향은 단순한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만은 아닌 것 같다. 고향은 내게 힘 의 원천이 된다. 고향 한가운데 아버지가 서 계신다. 나의 동생들과 벗들도 그 곳에서 웃고 있다. 더 이상 친구들은 나에게 개천에서 용났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도 나의 고향을 동경한다. 고향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그 무엇보다 승주가 큰오빠를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노을처럼 번지는 따사로움으로 큰오빠는 주위 사람들을 감쌌다. 그 때문에 많은 어려움들을 겪기도 했지만 결코 후회하거나 좌절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면 제일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큰오빠에 관해서였 다. 그렇게 큰오빠 경주는 승주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승주는 방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노란색 장판 위로 승주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어렸다. 그녀 는 장판 위로 흐르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든 스스로를 애써 지우 려는 듯 방바닥을 외면하며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승주는 잠시 잃었던 웃음을 되찾으며 일기장을 넘겼다. 뭔가가 일기장에서 툭 하고 떨어 졌다. 샛노란 마로니에 잎이었다. 승주는 그것을 주워 들고는 잎대를 검지와 엄지로 빙그르 르 말아 돌리면서 6년 전 낙향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마로니에 잎은 6년 전 오빠가 졸업한 중학교 교정에서 주워 와 끼워 넣은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빛깔 하나 바래지 않고 고스란히 종잇장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신 기하기만 했다. 승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큰오빠가 계획했던 구기자 사업에 직접 뛰어들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승주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나마 김 제 댁 아주머니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나긴 했지만, 시작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큰오빠는 끝내 자신의 계획은 구상으로만 남긴 채 캠퍼스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로 올라가던 날, 큰오빠는 승주에게 말했다. '승주야, 물론 나도 네가 좋은 데로 시집가서 평탄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는 아직 젊지 않니? 사람의 가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고 있고 나 또한 그런 생각으로 살아간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 내일 을 창조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오늘을 통해서 내일을 포기한다. 난 네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비록 조그만 농장에 불과하지만 너에게 맡기고 싶다. 이 젠 그 길을 네가 나서서 걸었으면 해. 부탁한다.' 그 날 밤 승주는 물기 오른 마로니에 잎을 오빠의 일기장에 꽂으며 미래에 대한 벅찬 희 망으로 한 줄기 눈물을 떨구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루에 앉아서 한없이 검게 흐르 는 가을 밤 하늘을 바라보며 승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오빠가 못다 한 모든 것을 일구 겠노라고. 오빠가 평생 지고 가야할 그 짐을 덜어 주어야겠다고 그녀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6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승주는 놀랍기 만 했다. 결국 그런 집안 꼴을 보고서도 돌아서야 했던 오빠. 캠퍼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오빠의 그 외고집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간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세월이 약인 것처럼 자잘한 시름과 노고는 세월 저 편으로 물러가고 찬란한 빛만이 그들 앞에서 작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승주는 올케 영은과 한 집에 살면서 가끔씩 큰오빠의 일기장을 함께 들여다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승주는 영은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후배이자 올케 언니가 된 인연. 아꼈던 후배라 영은을 곁에 두고 있으면서 큰오빠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영은의 주위엔 그녀 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큰오빠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결국 영은은 다른 후배 들보다 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승주는 마로니에 잎을 일기장 사이에 꽂으며 다시 몇 장을 넘겼다. 언제나 자기 일기장처 럼 샅샅이 뒤적여 보지마 언제나 새롭게 느껴지는 노트였다. 19 년 10월 15일 오늘은 명동성당에 가 봤다. 요즘 영진이는 성당을 나가는데 열심이다. 영진이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성당을 다니기 시작해서 영진이도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녀석은 참 싱 겁다. 어쩌면 나도 녀석의 그런 솔직한 면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영진을 보고 있으면 고향이 느껴진다. 그 넓은 고향의 들판과 낮은 산등성이들이 의좋게 늘어선 그 곳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성당 안으로 들어서서 영진이 기 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쁨에 젖었다. 고개를 숙인 영진의 모습엔 종교에 대한 믿음보 다 고향의 인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영진이 고향을 닮았기에 나의 친구이고, 또한 영진도 그런 이유로 나를 자신의 가장 가까 운 친구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일기를 읽고 난 승주는 은은한 커피 향이라도 마주한 듯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 겼다. 문득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벽시계를 보니 4시가 되려면 아직도 30분이나 더 남아 있 었다. 승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간단하게 출장 준비를 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립스틱과 아이섀도를 고쳤다. 그녀는 앳되기만 하던 자신의 얼굴이 어 느 새 다부진 여성스런 얼굴로 변한 모습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한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얼굴도 제나름의 품위를 갖춘 듯 해사한 얼굴 이지만 두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이 얼굴 전체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왼쪽 어 깨를 벽에 기대고서 망연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눈물이 따뜻하게 얼굴 곡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막내야, 점심 먹자. 어여 내려와라. 밥상 다 차렸응께."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승주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화장지로 조심스럽게 닦은 다음 방을 나섰다. "예, 곧 내려갈게요." 그녀가 눈물을 흘린 건 아마도 일기장 속에 고스란히 묻어 있는 큰오빠의 끝도 없는 깊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오빠에게선 아버지처럼 언제나 흙 냄새가 났다. 그리고 고향이 그려지는 그윽한 눈망울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승주가 고향진도를 지킬 수 있었던 건 큰오빠가 일궈 놓고 간 땅과 흙이 있었기 때문이 다. 큰오빠는 승주가 고집이라는 말을 감히 들먹이며 일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어 준 탄 탄한 정신적 지주였다. 식탁엔 어머니와 김제 댁, 그리고 승주와 승진이 전부였다. "엄마, 아버지는 여태껏 안 오셨어요?" "느그 아부지, 이장님 댁에 가셨구먼. 거기서 진지 잡수꼬 오신다고 전화가 왔제." 승주에게 아버지가 또한 큰오빠만큼이나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푸른 새벽빛에 입김을 내 뱉으며 들로 나가셔서, 해질녘이면 황혼을 등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버지. 다시 덧칠할 수 없는 그림이 되어 그렇게 서 계시는 아버지 앞에서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게 없었다. "엄마, 올부터는 아버지도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누가 아니라냐. 전에 한 번 말 꺼냈다가, 아이고 말도 마랑께. 황소 겉은 느그 아부지 고 집 이 시상에서 누가 꺾는다냐?" 이 집에서 십수 년을 함께 살아온 김제 댁이 맞장구치며 모녀간의 이야기에 끼여 들었다. "아이고, 성님. 그 어른 고집이라믄 나라에서 상 줄 고집이제라. 이 집 영감님처럼 근실하 신 분이 또 어디 있단가요." 김제 댁의 말은 백 번 옳고도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흙을 배반하지 않는 진정한 농군이셨다. 인생의 황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연세에도 불구하고 굳이 종일 뙤약볕 아래서 농사일로만 하루를 보내시는 아버지. 그 엄한 눈빛이 당신의 영원한 고향인 흙 앞에서는 자연스레 순한 소처럼 녹아들었다. '니가 질 믿을 만헌 놈이여. 어디서 니 같은 친구를 얻을 것이랑가.' 아버지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면 늘 소에게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셨다. 발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라 있던 아버지는 외양간에 소를 매어 놓고도 한참을 그 곳에서 떠 나지 않으셨다. 그저 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가득 넉넉할 뿐이었다. 소는 아버지에 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자식처럼, 가슴 속 깊이 자리잡은 것이었다. 잘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들썩이기만 하는 승주에게 어머니가 한마디했다. "왜 입맛이 없간디? 수저가 들어가는 것이 영 시원찮다냐. 입맛 없어도 몇 술 더 떠야 않 겄냐, 오래 차 탈라믄." 들릴 듯 말 듯 승주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밥그릇을 비운 승진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먼저 일어섰다. "승주야, 은제 광주로 간다냐?" 어머니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다시 물었다.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왜 시키실 일 있으세요?" 공기를 반도 못 비운 채 수저를 놓은 승주는 주전자를 집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아니, 정 서방 찬거리라도 좀 장만혀서 올려 보내야 헐 것 같어서 그란다. 니 언니 병원 에 그렇커롬 누워만 있는디 누가 옆에서 따땃한 밥이라도 제때 챙겨 줄 만한 사람이 있간 디. 장모라고 혀 줄 만한 것이 딱히 머 있다냐. 정 서방이 제일 쌩고생하지 않겄냐. 변변찮 지만 찬 몇 가지 올려 보낼라고 그랴. 쪼끔 시간 늦춰서 5시에 가는 것이 낫지 않겄냐? 너 도 피곤헐틴디 광주서 하루쯤 쉬었다 내이 서울 올라가도 괜찮을 성싶고......." 어머니는 서울로 출발하는 막내딸에 대한 염려도 되자만 출가한 딸 걱정도 눌러 두기엔 갑갑한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목메인 말을 승주가 알았다는 눈짓으로 바로 받아 고개를 끄 덕였다. "내일 정오까지만 광고사에 들어가면 되니까 엄마 말씀대로 할게요. 그런데 할머니는 요 즘 식사 좀 하세요?" 어머니의 얼굴엔 금세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봄이라서 그란지 엄니도 통 멀 안 잡술라 혀서 걱정이다. 어제께는 냉이로 쑨 죽 드시고 싶다고 해서 승진 에미랑 밭둑에서 냉이를 캐 와 죽까지 쒀 드렸는디 몇 술 안 뜨시드라." 승주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할머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리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사방에 가지런히 정돈된 할머니의 옛스런 물건들이 예전 같지 않게 느 껴졌다. 할머니의 손때가 많이 묻은 옥편과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서적들이 이젠 낡을 대 로 낡아 하늘하늘해져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주무시고 계셨다.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 듯한 모양의 손마디가 쉬이 힘이 풀려 있었다. 긴 머리를 고수하고 계신 할머니는 언제나 은비녀를 하고 계셨다.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안겼던 승주는 은비녀를 쏜살같이 잡아 뺀 다음 이빨로 억세게 마구 물어 비녀를 망가지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요놈, 요놈, 요 이쁜 것' 하시며 오히려 승주를 더 세게 끌어안아 주셨다. 지금이야 손녀딸에게 업혀야 할만큼 거동이 불편할 정도 가 되었지만....... '할머니, 오래 사세요. 승주가 있잖아요. 할머니 더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저 시집가는 것 도 보셔야죠.' 할머니를 한참 동안 쳐다보며 승주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마루로 나왔다. 현관에 서 승진은 어머니가 챙겨 놓은 찬통을 차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 승주는 부엌을 향해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이걸 다 장만하셨어요?" 어머니는 마지막 반찬인 듯한 반찬 통을 내오며 말씀하셨다. "있던 김치허고 나물 몇 가지에다가 생선허고 장조림헌 것 이고만. 입에 맞을랑가 모르겄 다." "엄마도 새삼스럽기는, 장모님 음식이라면 끔뻑 죽는 사위를 두고 별 걱정 다 하시네요. 그리고 그게 정성이지, 뭐 일류 요리사 될 일 있어요?" "허긴, 정 서방이 좀 먹성이 좋냐? 이것저것 안 가리고 먹어준께, 내사 고맙지야." 어머니는 사위를 생각하며, 그저 손주들이 그립기만 했다. "아이고, 선주랑 선민이는 잘들 크는가 몰러. 엊그제 저녁 정 서방이랑 통화허고 있는디 고것들이 어찌나 아양을 떠는지. 이 할미 보고 싶다고 방학 때 내려온다고 혔는디, 안즉 방 학 될라믄 석 달은 거자 남었지야?" 승주는 안타까워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엄마, 그러지 말고 오늘 함께 올라가셔서 며칠 광주에 머물렀다가 내려오시는 게 어떻겠 어요. 선주랑 선민이도 보고 언니 집도 봐 주고 좀 좋아요?" 승주의 말에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아서라. 느그 할머니 병 수발은 누가 들고, 또 이 크난 집을 김제 댁헌테만 맡기 고 나 혼자만 편허게 광주에 어떻커롬 앉어 있겄냐." "엄마는 참, 그러니까 평생 어디 맘놓고 여행 한 번 못 가신 다니까요." 승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간단히 인사를 하고 승진을 쳐다보았다. 이미 출발 준비를 끝 낸 승진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차는 널따란 나무 대문을 지나 조심스럽게 대문 앞으로 나갔다. 승진은 좌우를 살피면서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그 때 왼쪽 골목에서 꼬마 아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찢어질 듯한 요란한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에 놀란 김제 댁과 남산 댁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그러나 승주는 창을 열고 여유를 부렸다.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아이가 갑자기 튀어 나와서 그랬어요." 승진도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괜한 염려 말랑께요. 운전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라." 그러나 남산 댁과 김제 댁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차가 운림산방까지 나서는 것을 보고 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서울행 도로는 한산했다. 가끔씩 창 밖으로 매끈한 차들이 열대어처럼 스쳐 지날 때마다 미지근 한 바람이 들어왔다. 승주는 큰오빠의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을 넘길 때마다 굳은 지 오래인 듯한 곰팡이가 석고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거기서 나는 마른 곰팡이 냄새가 승주는 그리 싫지 않았다. 오 히려 그것이 오빠의 체취인 것 가타 친근함마저 느꼈다. 차가 나주를 빠져나가자 줄을 잇는 차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좀 전까지 라디오를 켜 놓 았던 승진은 잽싸게 CD로 갈아 끼웠다. 귀에 익은 팝이 차 안 가득히 흘렀다. 승주는 한참을 흥얼거리다가 가사가 나올 쯤해서 그것이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걸 알았다. 승진은 후렴구가 시작되면서 승주를 의식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승진이 너, 이글스 좋아하나 보구나?" 이 말에 승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흥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쑥스러운 듯이 오른손 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것저것 듣는 게 좋아라. 누가 좋고 누가 나쁘고가 없단께요. 그냥 힘있는 음악이 좋아 라." 승주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승진을 쳐다보았다. "그럼 출근할 때마다 록 같은 걸 듣지, 왜 매일같이 비발디의 사계만 듣니?" 의아해하며 묻는 승주에게 승진은 웃으며 대꾸했다. "저야, 누님이 좋아하는 걸 들어야 맘이 더 편하지라. 하기야 갖고 있는 클래식이 비발디 밖엔 없기도 하고요." "......." 그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승주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좀체 멎을 줄을 몰랐다. 한바탕 웃고 난 승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클래식 좋아한다는 말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을 보면 너도 참 재밌는 애야." 승진과는 어렸을 때부터 오누이처럼 지내 왔다. 승주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승진은 김제 댁과 승주네 집에 들어와서 이제껏 한솥밥을 먹고살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아이였다. 승주는 이 차를 마련하기 전인 재작년가지만 해도 혼자서 읍내 버스를 타고 회사에 출근 했었다. 지금 이 차는 회사의 이미지가 있다는 간부들의 요청에 못 이겨 마련한 것이었다. 그 때는 승진도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목포에서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 느라 집을 떠나 있던 상황이었다. 승주는 낯모르는 사람에게 운전 일을 맡기는 것보다는 한 식구나 다름없는 승진에게 일을 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승진은 바다 농 산물의 정식 직원으로 승주와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김제 댁은 자신과 승진이가 승주네 신세를 너무 과분하게 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미안함 도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대견스러워했다. '이 집 들어와서 지는 복 받었어라. 인자껏 밥 묵여 줬지, 또 넘 사람겉이 안 보고 다독거 려 줌시로 아들꺼정 거둬 준디 멀 더 바랄 것이 있겄어라.' 거의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승주와 남매나 다름없이 자라 온 승진은 원래 말수도 적 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또래 여자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승주 가 그녀의 큰오빠를 따랐듯이 승진은 승주를 아주 잘 따랐다. 승주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지 다 좋아하려 했던 승진이었다. 승주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집에 있으면서 줄곧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갖고 있는 클래식이 비발디밖에 없어서.......' 승주는 옛 기억이 떠올라 승진의 뒷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백미 러로 보았는지 승진은 슬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추억에 잠겨 있느라 들리지 않았던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매우 익숙한 선율이었다. 한때는 줄줄 외면서 불렀던 팝송이었는데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스 송 킬링.......'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가사 때문에 승주는 답답했는지 승진에게 물었다. "지금 나오는 노래 제목이 뭐니?" "아따, 그러니까 거 머시냐 이게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스 송'이지라." "그래 맞아. 오랜만에 들어도 여전히 좋구나. 아직 내가 늙지는 않았나 봐." "얼레, 누나도 별 소리 다 한다요. 누나보고 누가 그런 소릴 허겄어라." 승용차는 어느 새 광주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승주는 일기장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길이 너무 막히네." "여기서 한 10분은 있어야 될 것 같어라." 승진이 고개를 뒤로하며 말했다. "서두를 것 없어, 승진아. 시간 다투는 일도 아닌데 그냥 좀 기다리자." 10여 분 동안 꼼짝 않고 도로 한가운데 서 있던 차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사이 승진도 간신히 교차로 앞까지 나올 수 있었다. "대학 병원이면 시방 여기서 좌회전을 해야 할지 직진해야 할지 잘 모르겄어라." 승주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예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서 우회전해서 순환 도로로 빠지는 것이 빠를 것 같은데." 차는 미등을 깜박이며 비스듬히 우측 차선으로 접근했다. 승진은 1차선으로 진입하자 제 법 속력을 내며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가 다시 교차로 앞 육교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육교 위로 한 무리의 노란 유니폼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재잘거리며 건너고 있었다. 승주는 조카들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 신호가 바뀌자 마자 검은 색 차가 뒤에서 승진의 차를 들이받았다. 부딪치는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다. 승 진과 승주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지만 뒤범퍼 쪽이 많이 손상된 듯 했다. 운전석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렸고 승진도 내려서 차의 손상 상태를 살폈다. 여 자가 승진에게 몇 마디를 건네더니 다시 차에 올라탔다. 승주는 오는 승진을 바라보며 물었 다. "많이 부숴졌어?" "깜박이가 나가고 범퍼가 좀 만이 찌그러졌어라. 여자가 자기 실수라고 바쁘지 않으면 아 는 수리 센터에서 손보고 가라고 하는디 어쩐다요?" 승주는 잠시 생각한 끝에 여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급할 것도 없는데 고치고 가자.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고치는 게 낫겠지?" 그 차가 먼저 앞서 나갔다. 서너 블록을 지나친 다음 좌회전해서 바로 맞은편 카 센터로 차를 몰았다. 카 센터 주인이 사무실에서 나와 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인사를 건넸다. 여자 가 차에서 내리자 주인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여자는 상황을 설명하며 남자와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눴다. 시계가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비공은 수리를 하는데 적어도 30분은 걸릴 것 같 다면서 승진에게 키를 달라고 했다. 승진은 오락실에나 갔다 오겠다며 길 건너로 모습을 감 춰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승주는 차에서 내려 카 센터 마당을 서성거렸다. 밖에서 멀거니 서 있는 승주에게 여자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여자는 승주가 문 앞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무실로 같이 들어갔다. 조금 전 여인과 인사를 나누었던 주인은 사무용 책상 앞에서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승주에게 앉으라 는 시늉을 해 보이며 통화를 계속했다. 통화를 끝낸 주인이 냉장고에서 캔 음료수를 내오자 여자는 그것을 받아 승주에게 주며 말을 했다. "바쁜 길인 것 같은데, 저 같은 초보를 만나서 일 치르시네요." 승주는 의외로 부드러운 여자의 말투에 흠칫 놀라면서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리 바쁜 일도 없었어요." "무슨 일로 광주에 오셨어요? 번호판이 전남인 것 같던데......." 승주는 갑작스런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 병원에 입원한 언니한테 가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사고라도?" 승주는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가족 얘기를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언니가 신장 결석으로 입원했는데 그 곳에 가던 길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언닌데 유독 몸이 약해서 어렸을 적부터 병원 문턱이 닳도록 자주 왔다 갔다 했거든요." 얘기를 듣고 난 여자는 도리어 승주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참, 많이 고생했겠어요. 생각하는 것보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우리 친정 아버지도 그 병 으로 6개월을 병원에서 계시다 돌아가셨죠." 여자는 더 이상 많을 꺼내지 못하고 숙연해지더니 잠시 후 또 묻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하세요?" "조그만 식품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원래는 오빠가 운영하던 건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제가 맡아서 하게 됐어요." 여자는 흥미로운지 계속 물었다. "오빠가 다른 일을 하시나 봐요." "그건 아니구요. 지금 오빠는 변......." '제 오빠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만큼 능력 있고 패기 있는 사람을 전 본 적이 없어요. 자랑 같지만 우리 오빠처럼 그 나이에 산전수전 겪어 본 사람도 드물 거예요. 사람이 너무 좋아 서인지 몰라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용도 당하고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 지 않고 성공한 오빠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승주는 금방이라도 오빠 얘기로 말문이 트일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있었다. 승주가 머뭇거 리며 말문을 닫자 여자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광주에서는 알아주는 의상실이에요. 언제 또 광주에 오시거든 한 번 들러요. 이것도 인연 이라면 인연이잖아요." 명함을 살피는 승주를 보며 여자는 묻지도 않은 그녀의 집안 얘기를 술술 꺼내기 시작했 다. "지금은 시내에 버젓한 옷가게를 갖고 있지만 제가 서른 되던 해까지도 날마다 끼니를 걱 정하면서 살았어요." 여자의 말은 갈수록 힘이 들어갔다. "저희 오빠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수재 소리 들으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집안 형편이 너 무 안 좋아서 공고를 갔죠. 그래서 그 계통으로 취직하여 이제는 집도 두 채나 마련하고, 시 장바닥에서 작은 점포로 옷이나 수선하던 저에게 의상실을 하나 내 주셨어요." 승주는 예의상 여자 오빠의 자수성가를 치하하며 수긍이 간다는 듯 말을 받았다. "정말 힘들게 자리를 닦으셨네요. 그래도 비 온 뒤 굳은 땅이 다지면 더 단단하다잖아요." 여자는 승주의 말끝을 가로챘다. "아, 그런데 이번에 오빠 집을 경유해 도로가 놓였는데 너무 헐값 배상이 나와 시청을 상 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를 했다지 뭐예요. 아마 그 변호사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 을 거예요. 그 변호사 별명이 진돗개 변호사라고 하던데, 일 처리가 어찌나 정확하고 매끄러 운지....... 언제나 승소를 하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 변호사 고향이 진도라서 그런 별명 을 갖게 되었다나 봐요." 여자는 핸드백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또 명함 한 장을 승주와 카 센 터 주인 앞으로 내밀었다. "변호사 선생님이 젊고 패기가 넘쳐요. 그 분의 남자다운 면모가 잊혀지지 않아요. 굉장히 똑똑한 분이셨는데 이름이 이 뭐였더라......." 승주는 여자가 내민 명함을 들여다봤다. '변호사 이경주.' 승주는 오빠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맞아요. 이경주 변호사예요. 우리 오빠뿐만 아니라 부산에 있는 올케 식구들까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몰라요. 저는 시댁이 대구라서 결혼 후 진도에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기 회가 되면 시댁 식구들 모두 데리고 꼭 가보고 싶어요." "......." 승주는 기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 정도로 들떠서 여자에게 오빠 얘기를 더 묻고 싶었지 만 정비공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걸 보며 그만두었다. "사장님, 손질 다 끝났습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계산을 끝낸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 언제 왔는지 승진이 시동을 걸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승주는 자신의 명함을 여자에게 건네며 인사를 대신했다. 여자는 바쁜 일이 없는지 다시 카 센터 주인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권희영 의상실이라고 저 여자가 한 대. 여자가 참 서글서글하더라." "복부인이나 되는 줄 알았지라. 고급 중형차나 놀리면서 캬바레나 댕기는....... 아무튼 보기 안 좋아라." "너도 생각하는 게 참 보수적이야. 내가 저 나이 돼서 저런 차림하고 다니면 나도 그렇게 보겠네." "참 누님도, 또 누님하고는 다르지라." 차에 올라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순환 도로로 빠져 나와 차를 몰아서인지 생각보 다 빨리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주차장에 차를 대고 두 사람은 현관으로 들어갔다. 승주와 승진은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자 밖으로 나섰다. 승주가 708호 병실 앞에서 노 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니가 반색을 하며 그들을 맞았다. 2인실이지만 1주일 전 부터 언니 혼자서 쓰고 있다며 건너편 침대에 앉으라고 했다. "몸은 좀 괜찮아?" 언니는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는데도 건강해 보였다. 언니가 웃으면서 가까이 오라는 손 짓을 했다. "응, 이젠 제법 몸이 가벼워진 것도 같구나. 아까 네 형부가 엄마한테 연락 왔다고 하더 라." 승주는 웃는 언니의 눈 밑에 기미가 낀 것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 병이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었나 봐. 눈가 가득 기미가 들어섰네. 그 이쁜 얼 굴이 반쪽이 됐어." 언니는 여전히 웃으면서 눈가를 매만졌다. "올 때 길 많이 막혔지?" "아니, 막히지는 않았어. 오다가 간단한 접촉 사고가 있어서 카 센터에 들렀다 오느라고 좀 늦었어." 언니는 순간 얼굴색이 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그냥 차 뒤범퍼만 찌그러졌어. 다행히 점잖은 사람 만나서 수리까지 하고 왔는걸." 언니는 그제서야 승진을 의식했는지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승진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승주는 일어서려는 언니를 말렸다. "승진아, 너 배고프겠다. 난 저녁 생각 없으니까 너는 나가서 저녁 먹고 와라." 승주는 지폐를 건네며 승진에게 말했다. 승진은 멋쩍은 듯이 돈을 받으며 가벼운 목례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병실을 나서는 승진을 바라보며, 언니가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연락이 왔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두 달 전 언니는 수업 중에 갑자기 옆구리가 아프다며 못 견디고 쓰러져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 응급실로 실려 간 언니는 신장 결석이라는 병명이 나왔고, 신장이 너무 부어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의 절망에 가까운 의사의 진단이었다. 형부는 이 병원 저 병원을 뛰어다니며 알아보았으나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식구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큰오빠가 가족 회의를 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 다. "민주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콩팥은 하나로도 문제가 없으니 내가 민주에게 신장 하나를 줘야겠다." 결국 오빠의 신장을 이식하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조직 검사와 혈청 검사를 하기로 했 다. 하지만 신장 이식을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혈액형과 항체 반응 검사 등 50여 가지가 넘는 각종 검사들을 한 후 그 결과가 90퍼센트 이상 이식자와 환자의 상태가 일치해야만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장을 이식할 때까지 언니의 고통은 날로 심해져만 갔다. 그래서 오빠를 비롯한 형부와 식구들은 유명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좋은 약이 없는지 수소문을 했지만 일시 적 이나마 진통제로 고통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심한 통증으로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던 언니가 깨어나 눈물을 흘리며, 건 너편 침대에서 자고 있는 큰오빠를 보며 승주에게 말했다. "무슨 죄를 그렇게도 많이 지었길래 이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오빠도 변호 사 개업한 지 얼마 안 돼서 바쁠텐데,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이렇게 광주까지 내려와 고생 을 하니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야. 오빠랑 너, 저녁은 먹은 거니?" "언니, 그런 부담 갖지 마. 우린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구. 절대로 큰오빠 앞에서 그런 서 운한 소리 꺼내지도 마. 내가 들어도 서운하니까." 승주는 미안해하며 눈물 흘리는 언니에게 그런 말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언니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자 큰오빠가 고입을 치른 후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새벽 기도를 드렸다. 아침마다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손바닥이 닳을 만큼 빌고 또 빌었다. 한 달이 빠듯하게 지나가고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면서 상황은 호전되었다. 굳이 이식을 하지 않고도 간단한 초음파 쇄석기로 결석을 깨뜨려서 소변으로 나오게 해도 된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요도와 신장 사이의 뼈가 아닌 부위에 결석이 있어서 쇄석기로도 얼 마든지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측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식수술 을 아예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류한다는 단서를 내세웠덨 것이다. 소변으로 깨진 결석이 나 왔을 때 형부를 비롯한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식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최종 진단이 내려지던 날 오빠는 언니의 손을 잡고 눈물 을 흘렸다. 승주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오빠의 눈물을 보았다. 두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문득 침대에 앉아서 지난날들을 그려보던 승주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언니, 뭐라고 했어?" "목마를 텐데 냉장고에서 음료수 꺼내 마시라구." 승주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냈다. 민주는 승주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 큰오빠로부 터 걸려 온 전화를 깜빡 잊고 있었다. "저녁에 오빠한테 전화왔었어. 다음 주쯤 언니와 애들 데리고 한 번 내려온다고 하더라." "요즘 서울집으로 전화해도 큰오빠하고 통화하기 정말 힘들어. 많이 바쁜가 봐." 승주는 큰오빠와 통화하지 못한 게 서운한 눈치였다. "엄마한테 전화한다는 걸 깜박 잊었네. 언니, 나가서 전화하고 올게." 승주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보세요. 엄마? 깜박 잊었어요. 여기 병원이에요. 저녁요? 예, 먹었어요. 너무 걱정 마세 요. 경주 오빠한테서 연락 왔다구요? 네, 들었어요. 아까 언니한테도 연락했대요. 예, 그럼 끊어요." 민주가 병실로 들어서는 승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통화했니? 걱정 많이 하시지?" "맨날 똑같은 소리지.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형부랑 언니 잘 챙기라고. 특별히 다른 말 씀은 없었어." "걱정하시지 않게 나 괜찮다고 하지 그랬어." "안 그래도 계속 걱정하시길래, 언니 얼굴 많이 좋아 보인다고 했어. 그러니 엄마를 위해 서라도 빨리 일어날 생각이나 해. 도착하자마자 연락 드린다는 걸 깜빡 했지 뭐야." "너도 이제 철드나 보다. 그런데 너 결혼은 안 할 거니? 선도 안 보고......." "결혼은 나 혼자 하나? 누가 있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난 아직 할 일이 있잖아." 다섯 형제 중 혼자 남은 건 승주뿐이었다. "임자가 없어서 못 가는 거야?" "......." 결혼 얘기가 나올 때면 괜스레 수줍은 듯이 승주는 말머리를 돌리곤 했다. "오빠도 복 덩어리 거저 얻었지. 우리 올케만한 사람이 또 있을라구. 둘이 금슬 좋은 거 보면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싶어." 올케 영은의 얘기를 꺼낸 승주는 결국 그것도 오빠의 얘기임에 실없이 웃어 버렸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승주는 언니와 있었던 어릴 적 얘기를 꺼냈다. "언니 그 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내가 막 초등 학교 입학했을 때, 언니는 중학교 2학년 이었지? 토요일날 예방 주사 안 맞는다고 학교에서 도망쳐 왔는데 언니가 나 데리고 읍내 보건소에 가서 주사 맞힌 일 기억 나?" 언니는 빙그레 웃으며 승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억 나지. 그 때 너 달래서 간호사한테 데려가느라 엄청 애먹었지. 주사 바늘 들어갈 때 힘주면 주사 바늘 부러진다고 간호사가 겁주니까 꼼짝않고 있었던 일, 모두 기억 나지." 승주는 언니의 침대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언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 "언니하고는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지 못한 것 같아. 물론 나이 차이도 있긴 했지만 난 언제나 큰오빠 곁에서만 맴돌았잖아. 그래서 요즘 들어 너무 언니를 몰랐다는 생각을 자주 해. 언니, 미안해. 난 아직도 어린가 봐." 승주는 눈물을 떨구며 언니의 품에 안겼다. "별 소리 다한다. 울지 마, 형부 오실 거야." "언니, 미안해. 자주 와 보지도 못하고....... 아까 복도에서 잠깐 형부 봤는데 많이 야위셨 더라. 빨리 여기 나가야지. 병원이 뭐 좋다구, 이렇게 오래 있어. 알았지?" "승주야,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언니는 네 맘 다 알아. 나라고 좋아서 여기 이러고 있 겠니? 형부나 애들 생각해서라도 빨리 일어나야지. 우리 막내 우니까 언니 속이 말이 아니 다. 그만해." 승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민주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때 병실 문이 열리고 형부 와 승진이 함께 들어섰다. 형부는 포장 초밥을 언니의 침대맡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들어오는 길에 초밥이 맛있어 보이길래 사 왔어. 처제, 뭐 다른 거 사다 줄까?" "형부는 여전하세요. 전 언제 형부 같은 사람 만나죠? 우리 언니, 참 복 많은 여자라니 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남잔데, 우리 처제 짝 하나 없겠어? 걱정 마. 나도 다 생각해 놓 은 게 있으니." "당신 정말이에요? 나한테는 그런 얘기한 적 없잖아요." "저번 동창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얘기가 나와서 나도 막내 처제 얘기를 했지. 대학 친구 놈 동생인데 연구소 연구원이래. 컴퓨터 CPU 칩 만든다고 하더라구. 여자 위할 줄도 알고, 성격이 무지 좋은 놈인가 봐. 처제도 만나 보면 좋아할 거야. 어때, 자리 한 번 마련해 볼 까?" "글쎄요." 승진이까지 옆에 있어서 그랬는지 승주는 얼굴이 벌개지는 것 같아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찾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딨어요. 아직 만나 보지도 않았는데....... 그건 그렇고 저도 아직 식사 전인데 언니 몫 좀 뺏어 먹으면 안 될까요? 승주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딴전을 피웠다. "한 번 만나 봐라, 승주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주위에서 챙겨 줄 때 만나야지 안 그러면 금방 삼십 줄이다. 너, 여자 나이 스물아홉이 적은 줄 아니? 방심하면 큰일이야." 민주가 승주 얼굴을 빤히 살피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형부는 당황해하는 승주에게 초밥을 권했다. "처제 몫도 사 왔으니까 맘놓고 먹어." 승주는 냉장고 위에 있는 쟁반을 가져와 초밥 포장을 풀었다. 형부가 젓가락으로 초밥을 집어 언니 입에 넣어 주는 것을 보니 언니와 형부의 연애 시절이 생각났다. 언니는 사대를 졸업하고 첫 부임한 여고에서 형부를 만났다.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힘들 어했을 때 형부가 많이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연애를 시작했고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는 언니는 학생들로부터 얄궂은 눈총을 받 아야 했다. 학교에서는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었던 형부였기 때문에 언니는 여우 선생님이란 말까지 들어야 했다. "처제, 같이 먹지 않고 뭘 해." 형부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승주는 창백한 언니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 빨리 일어나. 그래야 학교도 다시 나가지. 여기서 이러고만 있을 거야? 가만 보니 우리 언니 얼굴이 많이 상했네. 많이 먹고 빨리 퇴원해야 형부도 홀아비 신세 면하지." 형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언니는 미안한 듯 손을 내저으며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유년시절 꽃이 다 저 버린 개나리 대를 꺾어 들고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동네 골목길로 들어섰다. 아이들은 너나할것없이 알 수 없는 소리로 재잘거리며 사이좋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 어왔다. 유치원에 들어간 지 이제 한 달 여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아는 노래라고는 유치원 원가 가 전부였다. 남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마을 변두리에서부터 계속 흥얼거리며 걸어왔 다. "...... 모여 살구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상원유치원......." 정자나무 아래의 가겟집에 이르자 한 남자아이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사 라졌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나둘씩 저마다 집을 향해 꼬리를 감췄다. 노래를 부르던 여자아이도 동무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녹색대문이 아마도 집인 것 같았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엄마" 엄마를 큰 소리로 부른 뒤 대문을 들어서던 아이는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이는 겁먹은 토끼 눈으로,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소년들을 쳐다보고는 부엌 쪽 으로 냅다 달아나 버렸다. 이 모습을 본 경주는 부엌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쳤다. "승주야, 얼른 이리 와. 오빠 친구들이다. 인사 안 허냐?" 부엌 문 틈새로 멀거니 밖을 내다보던 승주는 그 때서야 소년들 가운데 큰오빠를 발견하 고는 안심한 듯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큰오빠, 오빠 친구들이야?" 승주에겐 오빠의 친구들도 친오빠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이 까까머리 남자들이었지만 오빠 의 친구들 중에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바로 윗집에 사는 미자 언니였다. 미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승주는 미자에게로 가서 안겼다. "아휴, 우리 승주는 왜 이렇게 이쁘꺼나. 눈도 땡그랗고 입술도 사탕 먹은 것 마냥 빨갛고 말이야. 나중에 미스 코리아 나가도 되겄네." 어느 새 승주는 그 까까머리 교복들 사이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옆집 김제 댁이 와 서 남산 댁을 거드는지 부엌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주는 뒤꼍에 있는 곡간에서 교자상을 내오며 친구들에게 받아 다라는 시늉을 해 보였 다. "야, 느그들 이리 와서 이것 좀 거들어라. 오늘 느그들이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앉어서 받 어만 묵을 수는 없제." 반찬 그릇들을 내오던 어머니는 경주의 말을 듣고는 말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가만히들 있그라, 손님은 손님이제. 느그들은 그냥 앉어서 맘껏 묵고 실컷들 놀다 가면 되겄구만." 경주는 어머니에게서 행주를 받아 들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미자는 경주가 쥐고 있던 행주를 빼앗아 들고 상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남산 댁이 내온 반찬들을 하나씩 상에 올렸 다. 김치, 풋나물, 생선 튀긴 것에 고기 지진 것 등 음식들이 참 맛깔스럽게 보였다. 말소리만 들리던 김제 댁이 밥공기를 조심히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워메, 다 까까머리에 시커먼 교복이라서 누가 누군지 모르겄네. 다들 하나로맨치 잘생겼 구만이라." 아이들은 밥을 내오는 김제 댁을 보며 그저 싱글거리며 웃을뿐이었다. 까까머리들 중에 제법 장난기가 있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폼을 재며 일어섰다. "아주머니, 그 중에서 지가 질 잘났다고 허셔두 괜찮단께라." 아이는 새까만 얼굴 때문에 유난히도 희어 보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맹랑한 아이를 찬찬히 뜯어보며 김제 댁은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말이여, 내 눈에는 다 잘났는디. 지금 보니 학생도 훤칠허니 잘생겼구만." 소년들은 김제 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잘난 체하던 소년을 한 대씩 쥐어박았다. 남산 댁은 국이 든 냄비를 가져와 멍석 옆으로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코끝으로 스치는 구 수한 음식 냄새에 슬쩍슬쩍 입맛을 다셨다. 소녀들은 소쿠리에 담기 수저들을 하나씩 나누 어 가지며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남산 댁은 국그릇을 상으로 놓으면서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채린 건 없어도 많이들 묵어라. 느그들은 다 내 자식이나 다름없단께." 막 수저질을 하던 한 소년이 부산을 떨며 말했다. "인자는 맨날 반장 선거가 있어야 겄네요. 이라고 와서 엄니도 뵙고, 밥도 묵고 가믄 참 좋겄구만이라." 아이들의 그런 티없는 모습을 보며 절로 흥에 겨운 김제 댁은 한없이 경주네가 부러웠다. "아따, 성님은 참말로 좋겄어라. 이라고 인물 잘나고 똑똑한 아들 둬서 잔치도 혀보고, 우 리 승진이도 경주맨치로 공부 열심히 혀야 허는디." 김제 댁은 등에 업은 아들을 어르며 연신 남산 댁이 부러운 듯 까까머리 소년들을 바라보 며 매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주네 집을 지나가던 이장이, 떠들썩한 경주 집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불 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장은 멍석 위에서 국을 푸고 있는 남산 댁에게 물었다. "형수님, 오늘 먼 날이랑가요?" 남산 댁은 부끄러운 듯 낯을 붉히며 살짝 웃어 버린다. 옆에서 있던 김제 댁은 이장에게 경주가 올해도 반장이 됐다는 이야기를 했다. "작년에 경주가 반장이었는디, 올해도 또 반장이 되었다고 아그들이 이라고 찾아와서 밥 이라도 묵이는 거여라." 이장은 멍석 곁으로 다가와 경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이거 시방 이 집에서만 잔치할 것이 아니구만이라. 경주 덕에 우리 상원리가 빛도 보고 혔응께 동네 잔치라도 혀야 쓰지 않겄소. 여하튼 남섭이 성님은 복도 많어라. 그람 전 이만 가볼라요. 느그들도 많이 먹고 놀다 가거라이." 남산 댁은 대문을 나서는 이장을 불러 신문지에 싼 떡을 주었다. "이거 오늘 헌 떡이어라. 채린 것도 변변찮어서 식사 대접이라도 혀야 헌디......." 남산 댁은 송구스러운 듯한 몸짓으로 떡을 이장의 옆춤으로 찔러 넣었다. "이게 머시랑가요? 형수님도 참, 이거 경주 덕에 떡고물도 구경하게 되었구만이라." 이장은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대문 밖으로 나섰다. 이장이 대문을 나서자 까 까머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부산하게 수저질을 해댔다. 아직도 누런 콧물이 들락날락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몸을 긁어 대는 놈 등 모두들 초 라하지만 59명의 경주네 반 아이들은 그 생생함 자체가 순박한 모습이었다. 소리 없이 밥술 을 뜨는 경주의 생각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4월 첫째 주 토요일, 상리 중학교 2학년 3반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종례가 끝나기 무 섭게 운동장 스탠드로 모였다. 오늘은 무턱대고 반장 이경주 집에 쳐들어가 반장 턱을 얻어 먹자는 거였다. 경주는 교무실에서 담임에게 간단한 지시 사항과 당부를 듣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오 는 길이었다.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운동장 스탠드에서 경주를 불렀다. 경주가 아이들에게 다 가서자,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경주야, 오늘 우덜이 느그 집 쳐들어가기로 해 부렀다. 너 반장 턱 얻어묵어야 쓰겄다." 경주는 웃으며 쉽지 않을 거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쭈, 그래서 이러고들 진치고 앉었냐. 야, 진을 칠라믄 확실허게 교문 앞에서 쳐야지 사 내대장부들이 쫀쫀하게 구석지가 뭐냐, 느그들이 도시 건달패도 아니고......." 좀 전에 말을 꺼낸 아이의 배를 가볍게 툭 치며 경주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운 동장 저쪽에서 영진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워따메, 느그들 솜씨 괜찮다. 이 멧돼지 겉은 경주도 붙잡을 줄 알고, 난 또 경주 꽁무니 졸졸 따라댕기면서 사정사정헐 줄 알었드만 썩 솜씨들이 괜찮은디." 경주는 영진을 슬쩍 한 번 쳐다보면서 영진의 가방을 끌어당겼다. "니가 꾸민 일이제?" 영진은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부반장이 뭐 할말이 있겄냐. 반장이 허라믄 허고 허지 말라믄 허지 말어야제, 안 그냐 느그들?" 모두들 벙벙한 웃음을 지으며 동의하고 있었다. 오늘은 경주가 아이들을 대접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집에서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하다못해 같은 반 아이들이라도 밥 한 끼 먹여야 되는 거 아니냐며 슬쩍 경주를 떠보던 일도 있고 해서, 경주는 아이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가는 미소를 흘렸다. "그라믄 가겟집에서 집에 전화허고 올랑께 쪼금만 있어라." 경주가 문방구를 향해 뛰어가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가는 모래 바람을 일으키 며 한 떼의 아이들이 빠져 나갈때까지 운동장의 흙먼지는 좀체 가시질 않았다. 경주는 문방구 겸 슈퍼인 학우사에 들러서 전화를 빌려 썼다. 문방구 주인은 아버지의 친 구분이셨다. 아저씨는 등,하교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를 하는 경주를 예뻐해 주셨다. "여보세요, 어머니여요? 저 경주여라. 별일은 아니고라 오늘 반 아그들이 반장 턱 얻어묵 는다고 집으로 가겄다는디, 어찌해야 허겄어라. 아부지 오늘 볍씨 고르신다 하던디, 괜찮겠 어라? 그럴라요. 걸어서 갈랑께 넉넉잡어서 1시간 후면 닿을 것 같은디라. 그럼, 끊을라요." 옆에서 듣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경주를 바라보았다. "경주 오늘 반장 턱 내는 날이다냐? 내 친구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이 놈 참말로 잘났어 야. 남섭이도 큰놈 하나는 잘 맨들었제." 아저씨는 문방구 문을 나서려는 경주를 불러 세워 빳빳한 지폐 한 장을 바지 주머니에 넣 어 주셨다. 거절하는 경주를 못이긴 아저씨는 끝내 가게 문 앞에 지폐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는 문방구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경주는 하는 수 없이 아저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그러는 동안 교문 앞에서는 또 다른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주를 제외한 영진을 주 축으로 한 아이들이 교문을 나서서 건너편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그 때 왼편에서 달려오던 검정색 세단에 한 아이가 치일 뻔했다. 아이가 조심성 없이 불쑥 차도로 뛰어든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꾸벅하는 아이는, 읍에서도 보기 드문 고급 차를 보 며 기가 눌린 듯했다. 아이는 당황해하며 쩔쩔맸고 이를 무시하며 그냥 지나가던 차가 갑자기 후진해서 아이들 앞에 거만하게 섰다. 뒷좌석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며 중년 사내가 양미간을 찡그리며 욕을 내뱉었다. "어디서 개거지 같은 놈들이 나타나서 야단들이야. 눈은 어디다 던져 놓고 다녀. 배워 먹 지 못한 놈들 같으니라고. 하여튼 촌놈들은 가만 보면 기본이 없어. 그저 땅바닥 같다니까. 이거 차에 무리가 가서 어쩌지?" 중년 사내는 겁에 질린 아니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히려 차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사내의 행동에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보다 지난 3년간 이웃 도시로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도시 생활을 조금 해 봤던 영진 은 배알이 뒤틀렸다. 사실 미안한 마음은 저쪽이 더 해야 할 텐데도 오히려 차 걱정이나 하 고 있는 것을 본 영진은 화가 났다. 중년 사내의 생김새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영진은 아니나다를까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중년 사내 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저씨, 사실 말하믄 이 애 잘못보다는 아저씨가 더 잘못한거 아니라요? 그라고 어디 다 친 데라도 없냐고 물어도 시원찮을 판에 차 걱정만 하는 게 어디 어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거칠게 닫으며 중년 사내가 내려섰다. 중년 사내의 오른쪽 턱 밑을 타고 흐르는 목주름살 한가운데 새끼 손톱만한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저 사람이...... 그 고약한 산림 조합장이랑께" 덩치가 제일 큰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 쏜살같이 몸을 숨기고는 도망칠 듯한 자 세를 취했다. 아이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영진과 중년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영진 앞으로 다가선 그 남자는 손을 들어 영진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이것을 본 아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서서히 아이들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고 영진은 얼얼한 뺨을 매만지며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진을 중년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이 자식이 어른도 모르는 순 쌍것 아니야? 네 놈 애비가 누구야? 이 자식 혼을 빼노항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년의 사내는 영진의 멱살을 잡고서 덥석 모퉁이로 몰아넣었다. 남자는 하얗게 거품이 인 가래침을 퉤 뱉었다. "그래, 너 이 학교 학생인가 본데 어디 누가 그렇게 잘 가르쳐 놨는지 들어 보자." 남자는 영진을 질질 끌며 교문 쪽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영진도 당하는 것이 분한지 중 년 사내의 멱살 잡은 손을 잡아 떼면서 악을 썼다. "도대체 지가 뭘 잘못했당가요. 차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말이 뭐 잘못이라도 된 거라요?" 이 때 차 뒷좌석에서 교복을 입은 소년이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내렸다. 소년은 영진의 위아래를 쭉 훑어본 다음 순식간에 주먹을 날렸다. 영진은 피할 틈도 없이 한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녀석이 감히 어른한테 대들어? 너처럼 못돼먹은 녀석은 혼 좀 나 봐야 해. 피라미 같은 게 어디서......." 얼어하게 아려 오는 턱을 어루만지며 영진은 다시 일어섰다. 영진의 눈이 소년과 마주쳤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필사적으로 뒤엉켜 나뒹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소년의 아버지도 둘 사이를 가를 수 없어 한 발작씩 물러난 채 바라만 볼뿐이었다. 중년 사내는 오히려 듬직한 제 아들이 동네 조무래기들을 단숨에 해치웠다고 생각하는지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감상하듯 쳐다보았다. 문방구에서 나오던 경주는 저 편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고 단숨에 달려왔다. 아이들의 새까만 교복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뿌옇게 보였 다. 영진과 낯선 소년이 싸우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막 어미젖을 뗀 강아지가 큰 개에게 전혀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을 하자고 무턱대고 덤비는 것 같았다. 낯선 소년은 체격이 무척 좋아 보였고 누가 보아도 영진 쪽이 힘에 부치는 싸움이었다. 영진의 배 위로 올라앉은 소년은 다시 주먹을 내리꽂을 기세로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때 경주가 달려들어 그의 주먹을 힘껏 잡았다.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넌 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소년이 오른쪽 눈에 핏발을 세우며 경주를 쏘아보았다. 그가 고약한 표정으로 일어서자 뒤쳐져서 떨고만 있던 아이들은 영진을 부축해 뒤로 빼내고 한 치쯤 물러나서 겁먹은 눈으 로 경주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때 소년과 함께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소년을 만류했 다. "오빠 그러지 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제발 오빠......." "너는 차에 들어가 있어. 어디서 계집애가 나서기는 나서, 버르장머리 없이." 여자아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다시 차에 올랐다. 경주 앞으로 바짝 다가선 소년은 그 사이 주먹을 날렸다. 날라오는 주먹을 살짝 피한 경 주가 다시 소년을 매섭게 쳐다봤다. 얼핏 그의 교복에 붙은 배지를 바라보았다. 광주의 제일 중학교 배지였다. 경주가 그의 배지를 보고 있는 사이에 이번에는 얼굴 정면으로 주먹이 날라왔다. 경주는 피할 틈도 없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코끝이 찡했다. 손등을 갖다 대니 끈끈한 검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경주는 소 년의 얼굴과 명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일 중학교 3학년 조일도 소년이 다시 주먹을 날리려다 말고, 땅바닥에 떨어진 경주의 노란 플라스틱 명찰을 쳐다 보고는 더욱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쳇, 2학년 3반 이경주라. 2학년인 주제에 까불고 있었군. 아래위도 모르는 너희들을 이 형님이 어떻게 해 줄까?" 소년은 새까만 에나멜 구두로 경주의 명찰을 있는 힘껏 짓이기면서 말을 꼬았다. 그리고 경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침이라도 뱉을 표정으로 잠자코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더니 그렇게 제 볼 일이 끝났다고 판단을 했는지 소년은 옷을 몇 번 털고는 통쾌한 표정에 여유 있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차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봄빛에 이 글이글 타오르는 검정색 새단은 저 편 길 끝으로 사라져 갔다. 경주는 맥없이 부서지고 긁힌 자신의 명찰을 바라보며 조일도의 얼굴을 되새겼다. 핏발이 가득 선 큰 눈 경주는 그 소년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았다. 기가 막힌 경주의 일행들은 다시 주섬주섬 가방들을 챙겼다. 영진과 경주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영진이 경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진은 조일도와 있었던 실랑이로 인해 경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 경주 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머지 같은 반 친구들 역시 나서서 말 한 번 못하고 뒤에서만 지켜 본 자신들이 부끄러웠다. 영진과 경주는 엉망이 된 얼굴을 씻어 내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털털하게 웃기만 했다. 아이들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경주 어머니가 챙겨 준 식혜를 마시며 한 마디씩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때마침 경주 아버지가 지게 가득 가마니를 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모내기 할 볍씨를 짊어지고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경주가 달려가 가마니를 받았다. 아이들도 자 리에서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짐을 내려 주었다. "언제들 왔다냐?" "아부지, 이 차대기 엇따 놔야 쓸 거라?"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면서도 아버지는 아이들의 분주한 손놀림에 내심 흡족해했다. "볍씨 소독할라믄 고무 다라이에 부서야 헌께 우물곁에다 노믄 쓰겄다." 아버지는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절반쯤 받은 뒤 선홍빛 소독약 반병을 털어 넣고는 볍 씨 가마니를 부었다. 아이들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기다란 장대로 쓱쓱 저을 때마다 분홍 빛 거품들이 진달래꽃처럼 피어올랐다. 장대를 빼 든 아버지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이제 됐 다는 눈짓을 보냈다. "인자 헐 일이 다 끝나 부렀네. 아들들이 많응께 참 편하구만. 느그들은 쉬엄쉬엄 놀다 가 그라." "아부지, 저거 언제 건져 내지라?" 영진이 정감 있게 제 아버지에게 묻듯이 말했다. "느그들은 이거 몰라도 쓴다. 농사는 농사꾼이 지는 법이고, 느그덜은 공부허라고 학교 보 내는 것잉께." "......." 아무 말도 없는 경주에게 아버지는 미안한 듯 커다란 고무 다라이를 가리켰다. "여그서 한나절 소독혔다가 깨끗헌 물로 씻어서 한 1주일쯤 물 갈아 줌서 담가 놨다가 방 에서 한 사나흘 쪄서 모판에다 뿌리믄 되제." 아이들 중엔 신기한 표정으로 듣는가 하면,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생글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때 큰마루로 나온 할머니는 담뱃대를 당기며 아이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 보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우물가에서 나온 아이들은 그 때서야 마루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보고는 넙죽 절을 해 올렸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고맙 다는 듯 손사랫짓을 연거푸 해 보였다. "아서라. 내가 시방 느그들한테 절 받을라고 여그 나온 것이 아니거라이." 할머니는 가끔씩 밭은기침을 하시면서 담뱃대를 빨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식혜를 내와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단숨에 밥알까지 후루룩 마신 뒤 대접을 다시 어머니에게 건네고는 막걸리를 걸 쳤을 때처럼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런 뒤 아버지는 창고 옆에 세워진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시방 나설 것 같으면 집이 상리 쪽인 애는 타거라. 오늘 면에 가서 비니루도 사고 해지 기 전에 면에도 들러야 쓰겄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마당에서 서로 몸을 치어 박으면서 짓궂은 장난 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주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상리 쪽에 사는 애들은 지금 우리 아부지가 거기로 가신다고 허닝께 생각 있으면 경 운기에 타라." 장난을 치던 아이들 대여섯이 경운기 쪽으로 몰려왔다. 덜덜거리는 경운기 뒤에 올라선 아이들은 사뭇 재미난지 경운기 엔진 소리를 내가며 키를 돌리는 시늉들을 해 보였다. 아버 지는 경운기의 기어를 올리고 아이들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느그들 위험허닝께 꼭 붙들어야 헌다." 경운기는 뻑뻑한 머리를 돌리면서 대문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뒤에서 이쪽을 향해 떨어 져 나갈 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문 밖을 나서는 아이들을 향 해 손짓을 했다. "으쩐다냐, 내 새끼들 잘 놀다 가는지 모르겄구만. 이 담에도 또 와라. 그 댄 더 맛난 떡 해 줄란께." 할머니는 경운기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털털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져 들리지 않을 때까지 대문을 바라보고 계셨다. 식구들 틈에 있던 승주는 잽싸게 마루로 달려가서 할머니 의 치맛자락으로 파고들어가 떠나는 오빠들에게 연신 손을 흔들었다. "으쩐다냐, 우리 승주 서운해서 어짤란고. 좋은 오빠들 다 가불고." 마당의 멍석을 말던 어머니는 아쉬워하는 승주를 바라보며 놀리듯 말했다. "우리 오빠는 경주 오빠, 건주 오빠, 희주 오빠밖에 없는디." 여섯 살 난 승주가 또박또박 오빠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곱게 땋아 내린 승주의 갈래 머 리를 만지작거리던 김제 댁은 사랑채에서 승진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리자 일어서서 총총걸 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세서 승주는 이틀 동안 광고 대행사인 에드컴 영상 제작 팀과 미팅 계획이 잡혀 있었 다. 승주가 광고에 대해 자문을 구할 데가 마땅히 없어서 방송국기자로 있는 우영에게 부탁을 했다. 다행히 우영의 주선으로 빠른 시간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우영은 오히려 승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경주에 대한 우정 때문에라도 더 나서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에드컴의 김현호 이사는 우영의 대학 후배였다. 우영은 대학후배 중 가장 아끼는 놈이라 며 어찌나 칭찬을 하는지 소개받기도 전에 내심 기대가 되었다. 학보사 후배라고 소개받은 김현호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고, 광고의 특성과 요점을 명확하게 잘 파악하는 감각 있는 사람이었다. 신사동의 한 고급 카페에서 인사를 나누기 위해 우영이 자리를 만들었다. 그게 처음일 것 이다. 김현호와 승주의 만남은. 넓은 카페는 산만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술렁이는 분위기가 승주의 마음에 들었다. 스카이 라운지에서 보는 전망이 꽤 멋스러운 곳이었다. 테이블 위에 하나씩 놓여 있는 꽃병에는 흰 달리아 무늬가 곱게 새겨져 있었다. 모처럼 만에 외출울 한 승주는 낯선 곳의 풍경에 잠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어리둥절 한 모습이었다. 각 테이블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척 진지하고 사뭇 달라 보였다. "승주야" 뒤에서 승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영일 거란 생각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좀 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넓은 홀 안에 혼자 외로이 덜어진 느낌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승주야, 못 들었니?" 우영이 승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영 오빠,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그래. 오랜만이다, 반갑다. 우선 저쪽 테이블로 가자." "네." 우영이 앞서 갔고, 승주가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우영의 어깨는 넓었고, 또한 듬직하며 당당해 보였다. 산뜻한 소라색 와이셔츠와 잘 어울리는 푸른 빛 넥타이가 물결이라도 이루는 듯했다. 누 군가가 특별하게 선물해 준 게 아니가 싶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넥타이핀도 승주 눈에 쏙 들어왔다.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우영이 기자로서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승주는 우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전공 은 법학이었지만 일찍이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그만큼 노력을 한 대가로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우영은 승주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가지 많은 도움과 격 려를 해 주고 있다. "인사들 해라. 이쪽은 내가 말했던 바다 농산물 사장 이승주, 그리고 이쪽은 학교 후배이 자 광고 대행사 에드컵의 이사 김현호."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호는 차분하게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간단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멀거니 서 있지 말고 앉지."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우영이 웃으며 말했다. 김현호는 훤칠한 키에 유난히 피 부가 희고 약간 타원형의 무테 안경을 썼는데 안경 너머로 보이는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판단력이 있어 보이면서도 이지적인 느낌이 들었다. 세 사람이 주문한 커피잔 위로 뽀얀 김 이 길게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이 사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같이 일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현호가 먼저 말을 한 후,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별 말씀을요. 제가 더 고맙죠. 광고 제작은 이번이 처음이라 모르는 부분이 많아 진행하 는 데 어려움이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희 회사를 찾아 주신 건데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나름의 노 하우도 있고 특히 영상쪽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광고 대행사보다......." "서로 얘기가 잘 풀릴 것 같은데, 이쯤해서 나는 사라져야 되겠다." "형도, 참. 형하고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섭섭한 말씀만 하시네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살 테 니 같이 일어나시죠." "아니야, 난 저녁 약속이 있어. 이번에 특집으로 나가는 게 있는데 여의도에서 인터뷰가 선약되어 있어. 가만 있자, 벌써 7시네. 승주는 내일 오후에 다시 연락해서 식사라도 같이 k 고 내려가야 내 맘이 편할 것 같다." "그럴께요. 약속 시간 늦지 않게 빨리 가 보세요." "여기 있는 세 사람 중에 누구 하나라도 한가한 사람 있겠니? 승주도 그렇고, 현호도 그 렇고, 먼저 일어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 "일 있으면 할 수 없죠. 형, 또 언제 봐요? 내일 저도 끼어 주는 거죠?" "글쎄다. 승주에게 물어 봐라. 승주랑만 몰래 데이트 좀 해 보려고 머리 쓴 건데 눈치 없 기는....... 낄 테면 그렇게 해라." "오라는 말보다 더 무섭네요. 확실하게 끼려면 그 정도의 배짱도 없어서 어디다 쓰겠습니 까? 그렇죠, 이 사장님?" 승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계속해서 웃었고 현호가 하는 말에 똑부러지게 대답을 하지도 못했다. "나 먼저 사라지겠습니다. 두 후배님들." "운전 조심해서 하시구요. 연락 드릴게요, 형." "오빠, 가세요. 고마워요." "고맙긴,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얘기 더 나누고 오늘 저녁은 나 대신 현호가 맛있는 걸로 잘 대접해라. 알았지?" 우영이 출입구에서 문을 열려고 손을 뻗자, 현관에 매달린 황금색 종이 서너 번 맑은 소 리를 냈다. 이튿날 오후2시경 에드컴에서 기획 회의가 있었다. 승진이 서울 시내 외곽에서 빠져 나와 한남대교를 가로질러 신사동 이정표를 보고 직진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출발한 지 30 분이 채 안 되어 도착했다. 하늘로 곧게 치솟은 은빛 건물에 지지 않을 만큼 높이 뻗어 있었다. 정문 앞에는 머릿돌 이 놓여 있어 회사의 기풍을 먼저 시사하는 것 같았다. 대리석에는 에드컴 로고가 위엄 있 게 새겨 있었다. 에드컴은 서울에서 광고 대행사로 꽤나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이 이 곳 에 광고 의뢰를 하며, 기존에 나와 있는 영상 제작물은 거의 에드컴에서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층 영상 제작국. 현관에 들어선 승주는 왼쪽 상단의 픽토그램을 보면서 영상 제작팀의 위치를 한 번 확인 했다. 승주가 간부 회의실로 안내를 받은 잠시 후 김현호 이사와 또 한 명의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남색 바지에 와이셔츠의 소매를 반쯤 걷어붙인 김현호의 차림이 활동적이고 인상 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형섭 차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승주라고 합니다." "오시는 데 불편하시진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김현호가 가볍게 말을 건넸다. "아뇨,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신 덕분에 잘 찾아왔어요, 초행길인데 도로가 워낙 시원시원 한 바둑판 같아 다른 곳보다 수월하더군요." "지금 어디에 묵고 계신가요?" "서울역 앞에 있는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때까지는 그 곳에 있으려구요. 서울역에서 한남대교로 오니까 빠르던데요." 승주는 미리 인사를 해서인지 김현호 이사를 대하는 것이 약간은 편했다. 일 때문에 만난 사람치고는 딱딱함보다는 다정다감한 면이 많았다.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얘기를 듣고 있던 서형섭 차장이 광고에 대해 말했다. "저, 이 서류 먼저 챙기시죠." 서 차장이 승주에게 먼저 광고 기획안을 내밀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그것을 훑어봤다. 서 차장이 몇 분간 브리핑을 하면서 서너 가지를 체크해 나갔다. "이번에 신상품으로 나올 것이 구기자 캔 음료와 캔디라고 되어 있는데, 주로 어필할 수 있는 대상이 장년층인지 젊은층인지 먼저 그것이 궁금하네요." "우선 캔 음료는 장년층이 주고객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상품의 성질로 보아 우리 농 산물인 만큼 젊은층도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캔디 쪽은 장년층과 아동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 차장이 왼편 끝 사물함에서 몇 가지 더 준비된 자료를 챙겨 왔다. "서 차장은 기획팀에서 인정하는 카피라이터죠." 김현호가 자료를 뽑아 보며 서 차장을 치켜세웠다. 승주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 다. "영상 제작팀에서는 CF를 주로 제작합니다. 라디오 CM도 같이하면 광고비도 줄이면서 효과는 이중으로 볼 수 있죠. 될 수 있으면 권하고 싶네요." "라디오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신문 광고도 지속해서 낼 생각이에요. 인쇄 매체는 어디서 작업을 해야 하나요?" 서 차장이 말을 받았다. "12층에 인쇄 제작국이 있습니다. 신문 광고는 시간이 촉박하지 않으니까 서두르지 않아 도 됩니다." "예." "광고의 주제를 어디에 초점을 두고 싶으세요?" "고향에 대한 향수에 두고 싶어요. 소비자가 CF를 보면서 고향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해 요. 물론 구기자에 대한 홍보도 중요하구요. 하여튼 저희는 에드컴만 믿을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 농산물임을 강조해 주세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컨셉에 대한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겠어요." 진지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따져 묻는 승주와 에드컴의 김현호 이사와 서형섭 차장은 꼬박 4시간을 회의실에서 보냈다. 서울의 아침 햇살은 유난히 눈부셨다. 승주는 피곤한 몸을 풀기 위해 어젯밤 피로 회복제 드링크와 비타민 양약을 먹고 눈을 붙였다. 그 덕에 잠을 푹 잘 수 있어 겨우 몸을 추스렸 다. 승진은 옆방에 묵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같이하려고 8시30분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승주가 옷을 챙겨 입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전화벨이 방 안 가득한 정적을 깨고 유난히 크게 울렸다. 승진일 것 같아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 사장님?" 승주는 뜻밖의 현호 전화에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어쩐 일이세요?"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했죠?" "아니에요,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아뇨. 서울에서 고생만 하다 가시는 것 같아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하는데 언제 내 려가시죠?" "고생이라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 오히려 에드컴쪽이 일하시면서 고생하셔 야겠어요." "그럼, 오늘 점심 식사를 같이할 수 있을지......." "어쩌죠? 아침 식사만 하고 바로 갈 생각이에요." "제가 한 발 늦었네요. 괜히 딱지 맞은 기분인데요?" "김 이사님도 참......." "점심 시간에라도 잠깐 뵈려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맞는 말이네요." "김 이사님, 저한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나중에 광고 진행하면서 뵙죠." "오늘은 일진이 별로 좋지 않은가 봐요." "자꾸 그렇게 얘기하시면 제가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닙니다. 별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조심해서 내려가시고 앞으로 일의 진행 상태를 봐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잘 부탁 드려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승주는 문득 김현호의 눈매가 생각났다. 이틀 동안 현호에게서 느낀 건 일에 대한 자신감이 그의 눈 속에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승주가 위축될 만큼 그의 과감 한 도전 정신도 높이 살 만했다. 고향으로 향하는 승주의 차는 호남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승진은 라디오 대신 CD 를 틀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 나왔다. 승주는 지그시 눈을 감고 등을 기대고 옛 기억 속으로 아련히 빠져들었다. 승주가 초등 학교에 딸린 병설 유치원에 다닐 무렵 승진은 젖먹이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처럼 승진과 어디든 함께 다니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승주는 감았던 눈을 뜨며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승진에게 물었다. "승진아, 너 우리집에 처음 들어와 살던 때 기억나니?" "......." 승주는 먼 태고적 얘기라도 하듯이 눈을 가늘게 치켜 뜨고 말을 시작했다. "그 때 네가 김제 댁 아주머니의 등에 업혀서 우리집 사랑채로 들어왔을 때, 네가 얼마나 우는지 아주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셨지. 막무가내로 큰 소리로 울기만 했던 네 모 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어떻게 아기 때를 기억하겄어라. 기억 못 하제. 돌아가신 아부지 얼굴도 기억이 안 나 요." 승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내력을 자세히 알게 된 후부터 이전과는 akgs이 달라졌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가끔씩 버릇처럼 아버지의 빚을 갚고야 말겠다고 되뇌곤 했다. 승진의 눈은 한 곳을 향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승진의 눈빛을 볼 때마다 승 주 역시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곤 했었다. 없는 자의 설움....... 승진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가난이었다. 없기 때문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 는 힘없는 자의 마지막 절규처럼 그의 아버지는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제 댁이 진도로 시집 올 당시 승진의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전부여서 고씨에 게 있는 땅이라고는 임야가 전부였다. 그래서 고씨는 이웃에 살던 경주네 밭을 붙여 먹으면 서 한 식구처럼 지내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도회지로만 떠돌던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와 잘 살아보겠다고 고향을 찾아 준 것이 고씨에게는 못내 고맙기 그지없었다. 승진이 태어나고 농사일도 제법 손에 익어 가 던 봄이었다. 한참 솔나방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지만, 승진의 아버지는 설마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마음 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예외없이 고씨의 산에도 솔나방이 앉고 하루가 다르게 그 검푸르던 솔숲들이 붉게 타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나무들을 베야만 했던 승진 아버지는 산림 조합에 인허가를 냈다. 그러나 허가가 자꾸 미뤄지기만 했다. 그것이 제재소 사장 유씨가 산림 조합장에게 뇌물을 먹인 것 임을 알고 있었지만 힘없고 돈없는 사람으로서는 달리 해 볼 방법이 없었으므로 하루가 다 르게 타 들어가는 나무들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도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제재소 일을 하던 유 사장은 벌목 기계로 시작해서 나무를 실 어 나를 트럭과 인부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놀렸다. 그래서 벌목을 해야만 할 실정에 놓인 승진 할머니의 임야를 헐값으로 사들여 많은 이문을 취하려던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조합장 조용만에게 유 사장은 지속적으로 뇌물을 먹였던 것이다. 조용만은 진도가 고향이 아니어서 아내와 아이들과 따로 떨어져 살림을 하는 실정인데도 상부에 뇌물 을 바쳐 가면서까지 이 곳에 남아 있으려는 속셈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상부에 뇌물 을 주고도 넉넉한 돈이 그에게 굴러 들어오는 거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승진의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고사된 나무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은 1마리의 개미가 언덕을 파헤쳐 가는 형국이었다. 그래도 승진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도끼와 톱을 들고 산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김제 댁은 시어머니 고씨와 경주의 아버 지를 앞세우고 자고 있는 승진을 업고 산으로 향했다. 타고 있는 횃불만이 움직일 뿐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산 속이었다. 달빛이 괴괴하게 내려앉은 산 중턱을 오르던 일행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승진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모두들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마주해서라 기 보다는 가슴께로 눌러 앉은 한이 삽시간에 그들에게로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승진 아버 지는 넉넉잡아 한 둥치가 넘어 보이는 소나무에 온몸이 짓눌린 채 숨져 있었다. 그러나 고씨는 울지 않았다. 단지 아내인 김제 댁만이 소리 없이 흐느낄 뿐이었다. 김제 댁의 등에 업힌 승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도 못한 채 새근새근 고운 숨을 몰아 쉬며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승진 아버지가 비명 횡사하면서, 한동안 승진의 집에는 사람의 출입이 뚝 끊겼다. 대문을 나서는 사람도 들어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뉴욕으로 시집갔던 고씨의 딸이 찾아와 고씨를 미국으로 모셔 갔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던 고씨의 딸은 선교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만난 사업가와 결혼하여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오빠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해 고향에 남아 있겠다는 어머니만이라도 모셔 가겠 다며 우겼고, 가지 않으려는 시어머니를 김제 댁이 며칠 동안을 설득한 끝에 고씨는 결국 뉴욕으로 떠났다. 이렇게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두 떠나 보낸 김제 댁은 1년여를 혼자 보내다가 시어머니와 동기간처럼 지냈던 경주네와 그 정이 깊어, 할머니와 남산 댁의 권유로 경주네 집에 들어와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남편의 사망 신고도 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 마를 하며 뛰어 놀았다. 의지할 곳이라곤 경주의 할머니와 남산 댁밖엔 없었기에 아이의 이 름도 승주와 친남매처럼 지내라고 승주의 앞자를 따서 승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남산 댁과 김제 댁은 벌써부터 운림산방 아래서 승주와 승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은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나무 그늘 밑에서 지루함도 잊은 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 다. 김제 댁이 남산 댁의 머리로 떨어지는 잔검불을 떼어 내며 물었다. "성님, 올해 승주 나이가 아마도 아홉줄이제라?" 남산 댁은 근심스러운 낯빛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걱정이네 그려. 나이는 차 가는디 야는 시집 갈 생각을 안 허니 말이여. 아무래도 갸가 일에 현혹됐는 갑이여. 으디 좋은 디 있으믄 시방이라도 보내 불고 잡구만." 김제 댁은 먼 산을 바라보면서 덧없는 세월의 흐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성님이랑 나도 존 날은 다 가부렀구만이라. 인자 성님은 승주만 여의믄 되고 나는 승진 이 하나 있는 거 식올리게 되믄 이 시상에 재밌는 일도 더 없을 것이어라. 내가 쩌그 김제 땅에서 여그로 시집 온 것이 엊그제 같은디, 벌써 며느리 볼 때가 돼부렀으니 말이어라." 남산 댁은 새삼 김제 댁의 메마른 손을 어루만지며 살아온 정을 나누고 있었다. "자네나 나나, 나이야 들었지만 이만큼 늙어서 복 터진 늙은이들도 없을 것이여. 두고 보 랑께. 승진이가 자네 끔찍허게 해 줄 것잉께." "성님, 진짜로 그럴꺼라?" 남산 댁은 김제 댁의 퀭하게 들어간 두 눈을 들여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암 그라고말고. 승진이가 말수가 적고 표를 안 내서 그라제 자네를 을매나 위허는디. 자 네는 아직 늙으라믄 멀었단께 그려. 자식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거 눈곱만치도 모르니 말이 여. 아직도 자네는 시상을 더 봐야 헐란 갑이네." 운림산방 맞은편에 있는 가겟집에서 오산 댁이 나왔다. "두 노인네가 뭘 그리도 정답게 이야그를 나눈다냐. 원 샘이 나서 가게에 앉어 있을 수 웁응께 이라고 나오는 길이어라." 이쪽으로 걸어오는 오산 댁을 보며 남산 댁이 실없다는 듯이 웃어 보인다. "자네는 샘날 것도 쌔부렀네. 다 늙은 노인들이 야그 좀 나눈 것이 다 샘나게."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너나할것없이 한바탕 걸쭉하게 웃어댔다. 그들의 웃음 속에서 도 지난 인고의 세월이 숨쉬고 있었다. 오산 댁이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서서 김제 댁 에게 물었다. "그란디 오늘은 어짠 일로 두 사람이 이라고 운림산방 아래로 나와 계시당가요?" 김제 댁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저께 회사 일로 우리 승진이하고 승주가 서울로 올라갔는디 저녁 때 여그 닿는다고 연 락이 와서 일찌감치 저녁해 놓고 이라고 나와 앉었지라." 그제야 오산 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를 깡그리 불살라 버릴 것처럼 무섭게 타오르는 석양으로 인해 첨찰산의 상록수림들도 움츠렸던 잎사귀들을 펼치고 있었다. 김제 댁은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석양 사이에서 매끈하게 달려오는 불빛을 발견하고는 모 둠발로 바둥거렸다. 옆에 앉았던 남산 댁은 그런 김제 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꼭 자네는 처녀들맨치로 지금도 참말로 고와라이. 자네만치 억센 고집도 따라갈 사람 없 단께. 그 허다하게 들어온 좋은 자리 다 물리치고 인자꺼정 버텨 온 걸 보면, 상 줘야 할 사 람이제." "별걸 다 상 준다요, 머 그리 잘난 것이 있다고. 남덜허는 만치 하는 것이지라." 김제 댁이 오른손을 눈가에 갖다 대며 사천 방죽 옆 왕온의 묘가 있는 비탈을 가리키며 허리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성님, 저것이 꼭 우리 차 같은디라?" "어디? 나는 안즉 암껏도 안 뵈는디." "저짝 너머 있는 비탈에서 내려오는 차 보이제라. 거 안 보이요, 성님?" 그제야 차가 보이는지 남산 댁 또한 모둠발로 그쪽을 향해 목을 길게 뺐다. "맞단께. 우리 차 같구만이라." 옆에 섰던 오산 댁은 가게로 손님이 들어가자 무거운 허리춤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차는 삽시간에 동네 들머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산 댁과 김제 댁은 길가로 갔다. 차를 몰던 승진은 두 사람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차를 세웠다. 승주가 차에서 내리며 승진에게 먼 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난, 어머니하고 아주머니랑 걸어서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쉬어라. 고생 많았어." 그렇게 승진을 먼저 보내고 승주는 어머니와 김제 댁, 셋이서 걸어 집으로 향했다. 어머 니는 승주가 손을 잡자 궁금하다는 듯이 힘을 주어 꼭 쥐었다. "그래, 서울 간 일은 다 잘 되었다냐?" "예, 우영이 오빠가 도와 줘서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었어요." 어머니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김제 댁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언제 박 기자네도 머라도 올려 보내야 헐틴디. 촌에서도 봄날이라 나는 것이 있어야 말 이제." "엄마는 별걸 다 걱정하시네. 우영이 오빠하고 우리하고 가리고 살 처지유?" "그래도 사람 도리가 그런 것이 아닌 법이여."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김제 댁이 한 마디 거들었다. "박 기자 덕보는 것도 경주 때문이제라. 여그 큰아들 덕 안 본 사람이 어디 있다요. 성님 은 자식들도 잘 노셨어라." "먼 말이랑가 자네 아들이야말로 좀체 착실헌가." "허긴 승진이도 내 밑에서 까탈 안 부리고 잘 컸지라. 참말로 시상 빨리 가 부렀어라. 성 님, 지가 성님네 집으로 승진이 업고 들어선 것이 엊그제 같은디요. 벌써 저렇커롬 커서 고 향발전 사업한다고 돌아다닌께 말이어라." 김제 댁은 좀 전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되뇌며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수줍게 웃으며 지 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기쁨보다는 넘어야 할 산들이 가득했지만 그런 고난스러웠던 시간들 마저도 이젠 기쁨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나란히 걷고 있는 세 여인에게 아이의 손을 잡은 여자가 다가왔다. "경주 어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경주의 소꿉동무 미자였다. "미자 내려왔구만. 딸이 지 엄마 닮어서 오목조목허니 이쁘게도 생겼는디, 꼭 미자 어렸을 때네 그려." 어머니는 연신 미자와 아이를 번갈아 보며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소연아, 인사해야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아이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고 이뻐라. 그래 오늘 내려왔다냐?" "예, 서너 시간 전에 왔어요. 애 아빠가 휴가라 지난 설 때도 찾아 뵙지 못해서 이번에 내 려온 거예요." 승주는 미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근황을 물었다. "언니, 전에 포항 살 때까지는 연락도 했는데 요즘은 통 소식도 모르고 살았네. 지금 어디 서 살아?" "응, 평택으로 이사했어. 포항에서 옮긴 지 5개월쯤 된 것 같아." 미자의 남편은 직업 군이었다. 경주가 군에 있을 때, 미자는 모처럼 마음먹고 경주에게 면 회를 갔었다. 바로 그 날 타고 갔던 버스에서 그녀 옆자리에 앉았던, 사관 학교 출신인 지금 의 남편과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첫인상이 참 좋아 보였고, 마음 씀씀이뿐만 아니라 외모도 성실해 보였다. 미자는 그 와 우연히 만났을 때 처음에는 인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업 군인이라는 점이 매우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구혼과 성의를 다하는 마음 씀씀이에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직업을 가졌음에도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상함이 언제나 한결 같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이 담긴 편지와 꽃다발을 잊지 않고 한아름씩 챙겨 준다고 했다. 미자는 결혼 후 여느 보통 여자들처럼 집안 살림만 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이 경주 때문에 맺어졌다며 두고두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미자는 좀 전에 승주가 물었던 자신의 근황에 응수라도 하듯 되물었다. "승주 너는 사장 노릇 할 만하니? 요즘 회사가 잘 되어 간다고 하던데." "아이, 언니는 사장이 별건가요. 맨날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지 뭐. 그래도 주위 사람들이 열심히 하니까 나도 열심히 하게 되더라구요." "그 오빠에 그 동생이지 뭐." 미자는 승주를 보면 유독 경주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꼭 덧붙이곤 했다. 미자는 몸을 뒤 트느 아이가 조금은 귀찮았는지 계속해서 응석만 부리는 딸애를 혼냈다. "애가 낯설어서 그런지 말을 잘 안 듣네요. 요즘은 정말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요.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거든요. 아주머니, 그럼 다시 한 번 찾아뵐게요." "그려, 이쁜 미자가 얼굴이 반쪽이 되어 부렀어이. 그래도 야그들 괜시리 미워하면 못쓴단 께. 잘 키우고 잘 살아야 혀." "고맙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미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마을 어귀로 사라져 갔다. 대문 밖에서 백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승주에게로 달려나왔다. 승주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 도 생각지 않고 백구를 껴안았다. 그런 승주를 보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희한허게도 승주나 경주 둘 다 어째 백구 좋아허는 것은 매시 똑같단께. 백구 없었으면 적적혀서 어떻게 혔을까 몰라. 우리집 백구를 보면 사람보다 나은 것 같다니께. 저렇게 아껴 주는 사람덜이 많은께 말이여." 부엌에서는 저녁 준비를 하느라 어머니와 김제 댁이 왔다 갔다 하며 바삐 움직였다. 승주 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손을 씻고 거들었다. "밖에서 일 보느라고 힘들었을 틴디 니는 들어가서 쉬지 그러냐." "아녜요. 아직까진 끄떡없어요. 아주머니, 제 솜씨가 못 미더워서 그러시는 거죠?" "아따, 괜한 말 혀서 오해 사겄네. 피곤하니까 눈 좀 붙이라는 것이지, 집안일이야 니 엄 니하고 나 하나면 충분하단께." "내비두게나. 자네도 별 걱정을 다하는구만. 쟈도 시집 갈 나인디 살림도 슬슬 배워야지 않겄어. 이 참에 틈틈이 집안일도 거들고 좀 좋겄는가." "성님도 막내딸 하나 데리고 있음서 넘들처럼 귀하게 키워도 될 틴디, 고집도 어지간 하 쇼이." 승진은 차고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피곤한지 곧바로 제 방에서 쉬고 있었다. 그의 방 창 으로 텔레비전 화면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이윽고 어둠이 사방으로 내려앉고 저마다 낮은 담들 사이에서 형광등이 깜박이며 하루가 저물어 갔다. 쌍계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줄기만이 동네의 밤하늘을 외롭게 지키 고 있었다. 잠들어 버린 승진을 제외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김제 댁, 승주 이렇게 다섯이 단촐하 게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 간척을 한 논에 객토를 심느라 매일같이 저녁 늦게 돌아오셨는데 오늘 만큼은 일찌감치 와서 막내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주는 오랜만에 일찍 들어오신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논엔 흙 많이 내셨어요?" 숭늉을 마저 마신 아버지는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승주를 바라봤다. "논에 흙 많이 내셨냐구요?" 그제야 승주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버지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인자 한 대여섯 마지기만 내믄 끝날 성싶은디, 당체 사람구하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아버지의 등이 많이 굽으신 것 같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일을 함께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지난 설에 도회지로 나가 버리고, 아버지 혼자서 농사일을 하시 게 되었다. 아버지는 푸념처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다며 못마땅해하셨다. "요새 농촌도 이만하믄 살 만한디, 종종 촌으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고들 그라더만 여 그는 좀처럼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어야제." 환갑을 지낸 나이에도 건장한 체구를 유지하고 계셨지만, 아침저녁으로 트럭을 몰며 사라 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자식으로서는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저 아버지, 요새는 위탁 영농을 많이 한다는데 아버지도 농사 맡기시고 이젠 좀 쉬셨으 면 좋겠어요." 승주가 아버지를 슬쩍 떠보면서 설득하려 하자 아버지는 펄쩍 뛰며 손사랫짓을 하셨다. "내 농토를 뉘 손에 맡기겄냐? 다 자기 것이 아니면 너도나도 어떻게 허면 신경 덜 쓸까 허고 연구만 허는디, 내 땅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어찌 발뻗고 편안하게 하루라도 쉴 수 있겄냐?"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그랬다. 외형으로 보나 내실로 보나 든든한 농산물 회사가 중소 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도 자식에게 의지는커녕 전보다 더 바쁘게 일손을 놓지 않으 셨다. 아버지에게 땅은 각별했고, 평생 소중한 친구이자 반려자였다.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마루로 나가셨다. 그러고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일일 연속극을 하는 채널에 맞춰 놓고는 곧장 이장 집으로, 벼 파종 물량을 기입해야 한다 면서 서둘러 나가셨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김제 댁에게 채근하듯 말했다. "승진이 깨워서 밥이라도 묵여야 하지 않겄는가? 귀찮어하믄 꿀물이라도 타다가 마시게 혀야제." "그냥 꿀물이나 한 사발 갖다 묵여야겄어라. 종일 운전을 혀서 그란지 인날라고를 안 혀 라." 김제 댁이 쟁반에 꿀물을 받쳐들고 승진에게로 갔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왔다. 할머니와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승주를 보며 어머니는 핀잔을 주듯 목청을 세웠다. "너는 안 곤허냐? 올라가서 얼른 쉬어야 내일 또 출근허제." 어머니는, 꼭 수험생의 엄마처럼 승주를 다그치며 위층으로 떠밀었다. "내 정신 좀 보랑께. 아까 장 상무가 전화 달라고 혔는디." "언제 왔는데요?" "너, 마중나가기 전잉께 아마 두 시간은 됐제." "아직 회사에 계시려나 모르겠네." 승주는 상무실로 전화를 했다. "네, 상무실입니다." "이승주예요. 장 상무님 계세요?" "사장님, 조금 기다리세요. 곧 돌려 드릴게요." 조금 기다리자 장 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장 상무입니다." "저예요. 조금 전에 서울서 내려왔어요. 전화하셨다구요?" "예, 서울 가신 일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네, 잘 됐어요. 내일 뵙고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럼, 편히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고향집으로 돌아온 승주는 장 상무와의 통화를 마치고서야 편히 쉴 수 있었다. 광고를 맡은 애드컴에서 김현호 이사가 직접 본사를 비롯한 공장 부지를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 오늘 진도로 내려오기로 했다. 지난번 서울에서 김현호의 마지막 통화 이후, 진도에서도 몇 번에 걸쳐 전화로 보고를 받 았는데도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주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그런 그녀가 특별히 기다리 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현호의 진도행은 그녀를 설레게 만들었다. 승주에게 오늘 아침은 유난히 출근 준비 시간이 촉박했다. 화장대 앞에 오랜만에 30분 이 상을 앉아 있었더니 어색하기도 하고 피곤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르고 집어 넣는다는 것이 립스틱을 그대로 세운 채 뚜껑을 버리고 말았다. 실수임을 깨닫고 립스틱 뚜 껑을 열어 보니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다. 승주는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어색한 모습을 거울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주, 너 뭐하니?' 그냥 코웃음이 났다. 지금의 이승주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수줍은 여인이 저 편 거울 앞에서 낯선 표정으로 승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금의 여유도 없이 뛰어들게 된 구기자 사업. 바다 농산물의 대표직에 있으면서 작지만 나름의 사명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런 승주에게 오늘은 뭔지 모른 그리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풋사랑. 승주는 대학 때 과 선배를 오랫동안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배는 그 때 당시 결혼 까지 생각하는 여자가 있었고, 승주의 마음만 받아들였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 후 선배는 졸업을 했고, 둘은 그저 선후배 관계로만 남아야 했다. 승주는 그런 마음 아픈 일 들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승주가 고집했던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행복과 미래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물러 설 줄 아는 용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선배를 잊기 위해 일을 더욱 열심히 했다. 그리고 자신이 빨리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건 큰오빠가 물려 준 지금의 지역 발전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 이외에 다 른 일로는 좀처럼 쉽게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지만 다른 새로운 인연이 승주를 기다려 주지 도 않았던 것 같다. 거울 앞에 앉아 있던 승주는 자신의 낯선 모습을 보면서 그저 옛 기억 속에서 머물렀던 그 선배를 가만히 떠올렸다. 그리고 뒷날개가 꺾여진 새처럼 옆구리가 저려 왔다. 거울 속의 승주 얼굴은 어느 샌가 몇 년 전 사랑 때문에 울고 웃던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거칠고 메마른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잊어버렸던 그녀의 사랑에 김현호가 빛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소녀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분명 승주는 변해 가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처럼 스물아홉해의 자리가 그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김현호를 알게 되면서부터, 오랫동안 자신도 잊고 지냈던 그녀만의 아름드리 추억이 하나 씩 열리고,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승주야, 오늘 출근 안 허냐?" 어머니는 마루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며 승주를 재촉했다. "네, 나가요." "오늘도 서울 출장 간다냐?" "아뇨." "그란디 먼 일로 치마를 다 주서 입고 그란다냐. 머시매처럼 바지만 입고 다니더니만, 고 렇게 치마 입응께 여자답고 좀 보기 좋다냐. 이제 맨날 그라고 다니거라." "오늘 회사에 바이어 오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입은 거니까 옷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이 입은 거라구요." "바이오가 머시다냐?" "늦었어요. 저, 가요." "이거사, 내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 없응께 나이 더 들기 전에 대책도 좀 세우고 혀라." 나가려던 승주는 어머니의 말에 휙 돌아섰다. "엄마, 혹시 또 결혼 얘기예요?" "그라믄, 승주 너한테 그것말고 아쉬운 게 당장 뭐가 또 있겄냐?" "저 그럼, 이만 출근해요. 아침부터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네?" 승주는 더 이상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현관을 급히 빠져나갔다. 어머니 말대로 예전과는 다른 차림이긴 했다. 무릎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친 자주빛 원피 스가 한눈에 쏙 들어왔고, 머리도 차분히 빗질을 해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머릿결이 고와 보 였다. 화장이 조금 진해 보이긴 했지만 그 동안 자주 안 한 탓일 뿐 옷차림과도 잘 어울려 화사해 보였다. 승주가 나가자마자 전화가 왔다. 남산 댁은 마루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쇼이." "안녕하십니까? 이승주 씨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갸가 출근했는디 무슨 일로......." "예, 서울에서 바다 농산물 광고를 맡고 있는 김현호입니다. 진도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예 정이 바뀔 것 같아서요. 사무실로 제가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쇼이. 저 이름이 뭐라고 허셨어라." "김현호입니다." "갸가 오늘 바이오 만난다고 허던디 혹시 그 바이오 맞단가요?" "바이오요? 예, 맞습니다. 제가 그 바이오입니다." 현호는 승주 어머니의 말을 듣고 웃음이 났지만 더욱 친절히 말을 되받았다. 김제 댁이 옆에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성님, 무슨 일 있어부러요?" "아무 일도 아니고 승주 덕에 언제나 국수를 먹으려나 싶어서 그랬는디. 아침에 나가는 걸 보니 그냥 두기 아까와서 그러제. 바이오 만난다구 혀서 외국인인 줄 알았더니만 서울 사람이지 않겄는가." "성님도 그게 먼 소리다요. 승주가 머시 부족하다고 그깟 국수 못 먹게 헐까라. 걱정 안 혀도 되닝께 마음놓쇼이. 늦깍이가 실수도 없고 더 잘 된다 안 혀요?" "자네 말대로만 풀리면 좀 좋겄는가. 암!" 승주는 현관에서 간단히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 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올라온 그녀는 책상 앞에 놓인 몇 가지 서류들을 읽어 본 다음 사인 을 하면서 졸린 눈을 깜박였다. 도무지 이 상태로는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인터폰으로 김 비서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그러자 1분도 채 안돼서 커피를 가져왔다. "고마워. 어제는 일찍 잤는데도 이렇게 졸리니 큰일이야." 김 비서는 쟁반을 손에 들고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 비서가 문을 나서자 스피커에서 사내 방송이 흘렀다. "오늘 하루도 안전과 맡은 바 충실한 업무로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이상 경리과였습니 다." 승주는 언제나 9시가 되면 흘러나오는 사내 방송이 귀에 거슬렸다. 매일같이 똑같은 멘트 에 사시사철 봄의 왈츠만 틀어 주는 방송이 한편으로 지겹기도 했다. '방송 멘트도 바다 농산물에 맞는 이미지로 바꿔야겠어.' 승주는 미래의 바다 농산물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복지가 우선 시 되어야 한다고 항상 생 각해 왔다. 신용 있는 큰 회사가 되려면 직원들 간의 화합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후생이 잘 되어야만 회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승주는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아침 10시면 직원 조회가 있다. 승주는 인터폰이 울리기 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사무 실을 나섰다. 직원 회의는 간단했다. 그 날의 업무 지시가 있고, 전날의 생산량 체크와 오늘 의 생산 계획 등의 얘기가 오갔다. "제가 깜박 잊고 있었네요. 장 상무님, 홍보 자료 준비 좀 부탁 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에드컴에서 김현호 이사님 일행이 회사를 방문하실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장 상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광고는 어느 정도 진행된 겁니까?" 장 상무가 무척 궁금한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선 그쪽에서 도착하면 듣기로 하죠.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승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 상무도 따라 일어났다. 승주는 회전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사장님, 전화 와 있습니다." "누구지?" "에드컴 김현호 이사입니다." "알았어요." 승주는 내선 전화 버튼을 외선 전화로 바꿨다. "네, 이승주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호입니다." "어디세요? 벌써 도착하신 거예요?" "저......." 가슴 아래로 그에 대한 반가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어디일까? 어떤 차림으로 이 곳 진도까지 내려왔을까? 내가 있는 땅을 그도 밟고 있겠구 나.' "찾아오시는 길을 잘 모르시면 직원을 따로......." "그게 아니라, 회사에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정이 바뀌게 되어 전화 드린 겁니다." "사정이라뇨? 진도에 도착하신 거 아닌가요?" "네, 아직 서울입니다. 그 전에 진행되었던 광고가 연장되는 바람에 회사에서 발을 빼지 못했습니다. 연달아 2주 동안 꼬박 날을 새서 꼴이 말도 아니구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언제 이 곳에 내려오실 수 있으시죠?" "어쨌든 죄송합니다. 연락을 일찍 드린다는 게. 지금 상황으론 확실하게 언제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괜히 난처해지는데요. 복수 당한 거 같아서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엔 제가 딱지 맞은 것 같거든요." "하하하." 승주는 어색하지 않게 너스레를 떠느라 혼이 났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통화를 끝냈다. 괜스레 부산을 떨었던 아침이 생각나 왠지 쑥스러웠다. 하지만 현호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승주의 마음속에서 점점 소용돌이 치고있었다. 새로운 시작 경주는 서울 지역 연합 고사를 보기 위해 서울에 원서를 제출했다. 입시철이라 3학년 교 실이 있는 4층은 가끔씩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만이 복도를 스칠 뿐,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조용했다. 경주 어머니는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러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꼭두새벽같이 일어나 밥 을 안치고 상을 봐 놓은 다음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목욕 재계를 하고 절로 향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제 댁은 그렇게 정성을 쏟는 남산 댁을 보며 부러움을 온몸으로 느껴 야 했다. "경주가 시험에 붙는 것은 지가 똑똑혀서도 그러겄지만 성님 덕이 클 것이구만이라. 요즘 시상에 누가 정화수 떠놓고 목욕 재계하며 새벽 기도를 올리고 공 드리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단가요." 사실 경주의 실력 정도라면 문제없이 시험에 붙을 실력이 되었지만 좀체 이 고장에서는 서울로 유학 간 아이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경주의 어머니가 그렇게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는 것이 지나친 것만도 아니었다. 또한 경주와 1, 2등 자리를 다투던 단짝 영진이도 서울로 함께 원서를 냈다. 3학년이 되면 서 서로 반이 갈리긴 했지만 그전보다 더 교류를 자주 하면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우정은 학교에서도 다 알 정도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죽마고우였다. 영진과 경주는 목포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엄습해 오는 추위를 피하며 역 대합실 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울까지 동행하시려는 부모님들을 설득시켜 결국 둘이서만 서울로 올라가겠다며 부모님들의 손을 떼어 내고 말았다. 진도읍 터미널에서 손을 꼭 쥐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시던 부모님들의 모습이 아직도 그 들의 눈엔 선했다. 역내 방송에서 서울행 기차의 승차 안내 방송이 흐르자 경주와 영진은 책가방을 들고 입찰구 쪽으로 향했다. 영진이 창가로 앉았고 경주가 통로 쪽 좌석에 앉았다. 영진은 언제나 창가 자리를 고집했 다. 그는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그의 성격처럼 자유스러운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창 가득 성에가 끼여 창문에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초겨울 날씨지만 제법 귓불을 때리 는 바람이 차가웠다. 모레 있을 고입 시험을 보기 위해 둘은 서울로 가고 있었다. 거의 삼총사나 다름없던 미 자는 광주로 진학을 결정했고, 경주와 영진은 부모님들의 기대뿐만 아니라 학교와 진도의 명예를 걸고 상경하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걸음이었다. 둘은 기차가 광주를 지나칠 때까지 손에 들었던 노트를 놓지 않았다. 그들은 그 때가지 바짝 긴장해 있었으나 기차가 광주를 벗어날 무렵부터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 조심스럽 게 상의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들에게는 의젓한 모습이 역력했다. 영진이 집에서 싸 준 삶은 달걀을 꺼냈다.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달걀이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다. 영진이 달걀을 하나 내밀면서 경주에게 물었다. "경주야, 니는 법관이 될 거라고 했제?" "맞다, 나는 꼭 법관이 될란다. 영진이 너도 법관이 된다고 안 그래부렀냐이." 경주의 물음에 달걀을 입에 가져가려던 영진은 고민스런 눈빛으로 경주를 바라보았다. "모르겄다. 인자는 법관도 하고 싶고 신문 기자도 되고 싶응께." "짜식이 욕심만 많단께." 경주가 가방에서 마분지로 가지런히 포장된 인절미와 깨엿을 꺼냈다. "이거 우리 할무니가 직접 만든 것이랑께. 이 놈만 묵으믄 꼭 달라붙어서 안 떨어질 거람 서 오늘 새벽에 집 나설 때 주셨제. 하나 묵어 봐라, 맛있단께. 사람들 말이 우리 할무니가 떡은 질로 잘 만든다 하셨제." 영진은 입가에 고물을 잔뜩 묻히면서 인절미를 한 입 베어 물엇다. "아따메, 맛이 기가 막히다야. 시험에 떨어질려다가도 다시 붙겄다. 안 그렇냐?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이 솜사탕 맛이다야." 영진의 털털한 성격은 언제나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오후3시 무렵이 되어서야 서 울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디딘 서울엔 벌써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허연 입김을 뱉어내며 짧은 감회의 탄성을 내지르고 있을 때, 역사 저편에서 경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 다. 역 광장으로 나서는 그들의 발치로 살얼음이 아슬아슬하게 밟혔다. 그들은 그 날 서울에 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경주 외삼촌의 자취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삼촌이 차려 주는 밥 을 먹고 일찌감치 고사장으로 향했다. 영진과 경주는 한 학교에서 시험을 치렀지만 건물은 동떨어져 있어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만날 수가 없었다. 먼저 고사장을 나선 영진이 교문 앞에서 경주를 기다렸다. 그 때 길 건너 편에서 경주의 삼촌이 달려오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기분은 어떠니?" 영진은 으레 '시험 잘 봤니?' 라고 물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묻자 달리 할말을 찾지 못하 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 때 언덕빼기에서 경주가 달음질쳐 내려왔다. 경주는 표정이 무척 가볍고 밝아 보였다. 경주의 삼촌은 영진에게 물었던 말을 다시 경주에게도 물었다. "뭐, 이런 기분이 좋은 거라면 좋은 것이어라." 경주는 덤덤하게 말하며 영진을 바라보았다. 영진은 경주를 한 번 쳐다보고는 엷은 미소 를 띄우며 웃었다. "시험은 잘 본 것 같다냐?" "뭐 평소겉이 혔는디 모르겄다. 니는 어쨌냐?" 경주와 영진은 시험이 끝나고도 기분이 얼얼해 있었다. 그렇게 묻고 대답하는 서로의 눈 에서 그들은 자신감과 미래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경주는 서울 고등 학교에, 영진은 남경 고등 학교에 입학하면서 나 란히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다행히 영진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경주는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와 함께 학교 부근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영진은 토요일 오후부터는 외박이 가능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이 되면 경주와 함께 창 경원, 남산, 명동 등을 다니면서 서울 구경을 했다. 그 넓은 서울 바닥에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둘에게는 얼마나 위로가 되고 든든했는지 몰랐다. 그리고 토요일이면 으레 할머니께서 차려 주신 저녁을 먹고 한 이불 속에서 서로의 고민 을 말하는, 그들에겐 더 없는 보람된 날들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아무리 할머니 손에 맡겨 놓은 아이라고 하지만 걱정이 된 나머지 남산 댁이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리 야무지대도 서울 바닥에 내놓은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니 얼굴이나 볼라고 올 라오지 않았겄냐." "어머니, 그런 걱정일랑 당체 마셔라." 그런 어머니를 마주한 경주는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는 여유까지 보이며 제법 도시 아이 같은 번듯함마저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달이 탈없이 지나고 학교 생활도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며 아 이들 또한 많이 친해져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경주는 외향에서도 남다 르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 보여 주는 그의 적극적인 자세로 언제나 선생님들로 부터 주목을 받았다. 경주가 서울 고등 학교 1학년 9반에서 생활한 지 꼭 한 달하고 1주일이 지나서였다. 평소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던 부반장 박우영이 국어 시간이 끝나고 경주에게 다가왔다. "야, 이경주. 너 글쓰는 거 보통이 아니던데?" 경주는 느닷없는 우영의 접근과 그가 툭 던진 말에 당황하며 처음에는 한 마디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 경주는 이제껏 말 한 마디해 보지 않았던 우영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들떠 있던 우영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경주는 쉽사리 그에게 말을 붙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 경주의 심정을 헤아린 듯 우영은 손을 경주에게 내밀었다. "사실 네가 고향에 대한 글을 발표할 때, 괜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구. 그리고 우리 아버지 고향도 광주야. 광주나 진도나 한 땅 아니냐?" 우영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우영의 호의를 기껍게 받아들인 경주 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경주에겐 새로운 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말이 되면 경주, 영진, 우영 이렇게 셋이서 추억들을 만들어 갔다. 가끔씩 우영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러 우영의 아버지 가 시켜 주는 자장면을 먹으면서 법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듣곤 했다. 우영의 아버지는 법무사이셨고 아들이 판사가 되길 바라셨다. 그래서 종종 경주와 영진이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법관이 되라며 입이 마르도록 훈계를 하셨다. 그런 우영은 아버지의 바람만큼이나 공부를 잘 했고 항상 전교에서 3등 안에 들었다. 노력도 노력이겠지만 우영은 무엇보다 머리가 비상했다. 경주와 우영은 주일이면 영진을 따라 명동성당에 갔다. 황혼이 지기 시작할 때 성당 안으 로 들어서면 색색으로 칠해진 천장과 벽면의 유리창들, 석양이 아스라이 번지면 사방이 밤 하늘의 우주처럼 빛을 발했다. 경주와 우영은 그런 분위기를 맛보는 재미로 영진을 따라 자 주 성당에 간 것이었다. 5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학교는 체육 대회 열기로 무르익었다. 점차 강렬해지는 봄 햇살 에 구릿빛으로 이글거리는 표정들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누비고, 예선 게임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수돗가에선 너나할 것없이 한바탕 물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햇살 속에서 녹아 내리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그들의 싱싱한 젊음을 말하기라도 하듯 수없 이 많은 무지개가 물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솟아났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가 대장부감이었던 경주는 진도가 아닌 서 울에서도 몸에 배인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3반과의 축구 예선전에서 승리를 하고 경주네 반 아이들이 수돗가로 몰려들었다. 이 날 골키퍼를 맡았던 경주는 예선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경주는 1골을 허 용 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반 아이들은 경주 덕에 시합에 이긴거라며 경주의 널따란 등을 한 번씩 토닥이며 악수를 청했다. 우영이 물총을 쏘면서 경주의 장난을 유도했다. "야, 이경주! 몸놀림이 제법이던데. 짜식 시골물 먹었다고 날쌔기는......."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건 거냐. 좋아, 한 번 붙어 볼래?" 어느 새 수돗가는 너나할것없이 수도꼭지를 틀어막고 가느다란 물줄기를 사방으로 돌아가 며 쏘아대느라 주변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드디어 체육 대회가 있는 날이다. 입심 좋고 재치 있기로 소문난 경주는 한 학년 선배와 함께 체육 대회 진행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네가 경주라는 녀석이냐?" "네." "소문이 자자하던데?" "무슨 말인지 도대체......." "임마, 무슨 사내놈이 그렇게 머리 회전이 느리냐? 선배가 멋진 놈이라고 반가워서 치켜 세우면 고맙다고 할 노릇이지. 짜식이 잔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쑥스러워서 그랬습니다." "허, 이 녀석 정말 숙맥일세. 겁먹지 말고 인사나 하자. 2학년 윤혁이라고 한다." 윤혁이 먼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잘 몰랐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1학년 이경주라고 합니다." "자주 보자. 그리고 아는 체도 하고." "그럼요, 선배님. 저는 축구 경기가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혁 선배와 경주가 상견례를 하고 난 후 며칠이 지나 몇 번의 자리를 함께 했다. 윤 선 배는 의리가 있었고, 남자다운 건강함이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학교에서는 내내 학생 선도부에 있었고 지금은 입시 준비로 정신이 없다고 했다. 친아우처럼 경주를 대해 주었던 고마운 선배였다. 오전 중에는 각 반에서 준비한 메스 게임과 달리기 등의 트랙 경기가 진행되고, 배구와 농구, 축구 등의 준결승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체육대회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남학생들의 가장 행렬은 가장 볼 게 많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여학생의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과 교복에 교모까지 갖추고 검정 보자기를 두른 이수일과 심순애 팀이 운동장 모퉁이에서 슬슬 나타나자 운동장 가장자리에 모여 있던 학생 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뒤이어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냥 춤을 추는 반, 멋드러진 기계체조를 해 보이는 반, 태권도 시범 등 각양 각색의 화려한 의상과 동작들이 이어졌다. 경주는 시골 학교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큰 체육대회를 보면서 휘둥그래지는 눈을 어찌할 줄 몰랐다. 특유의 노련함이 밴 경주는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재치 있는 말로 축제 분위기를 한 층 더 높였다. '도처에 깔린 이수일은 왜 그리도 심순애를 몰라볼거나? 아!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 랑가?' 떠돌이 변사의 긴 신파극을 보는 것 같은 경주의 말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윤 선배가 경주의 어깨를 툭 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짜식 끼가 대단한데, 연극해도 되겠는걸?" "선배님도 참........ 별거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코미디언 이 옛날 변사 흉내 내는 것을 봤는데 그것도 자꾸 하니까 늘더라구요." 윤 선배의 칭찬을 하자 경주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야, 나도 몇 번 해 봐서 아는데 누구 따라 한다는 게 쉬워 보이긴 해도 그게 또 안 그렇 더라구. 거기다가 너처럼 전혀 못하게 생긴 놈이 웃겨 봐라. 더욱 배꼽 잡을 일이지." 윤혁은 경주의 또 다른 면을 보고 환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경주의 얼굴 생김은 누구도 그의 장난기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과묵하고 준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그런 이질적인 조화가 오히려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몰랐다. 경기 진행 상황이 속속들이 본부로 접수되면서 경주는 쉴새없이 마이크를 붙잡고 흐름을 잡아 나갔다. 그렇게 오전 경기가 모두 마무리되고 1시간의 점심 시간이 있은 뒤, 오후가 되 면서 경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오전에 축구 준결승에 뛰었던 경주는 다시 운동장으로 나갔다. 8반과의 결승전이었다. 바로 옆 반일뿐만 아니라 두 반 사이의 친분은 평소 때도 남달랐 다. 물론 담임 선생님들끼리 허물없이 지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담임은 아이들이 결 승전에 임하기 전에 한마디했다. "멋진 사나이들끼리의 싸움이다. 페어 플레이 정신 잊지 말길 바란다. 있는 힘껏 뛰어서 승리를 이루길! 이상이다." 경주는 담임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담임은 강단 있는 거구의 사나이로 학생 들 사이에서도 진짜 사나이로 정평이 나있었다. 아이들은 한데 손을 모아 구호를 외치고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다.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경기였다. 바짝 조여 오는 긴장감으로 선수들의 눈빛은 그들의 발처럼 빠른 회전을 거듭했 다. 숨막히는 한판이었다. 전반은 1:1로 비겼다. 하지만 모두들 만족했다. 5분간의 휴식 후 다 시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달려나갔다. 선수들이 달려나간 자리엔 그들의 짧으면서 강렬한 외 마디의 구호가 그 무게만큼 깊게 울리고 있었다. '젊음, 패기, 정의.' 한 골을 추가해 2:1로 경주네 반이 앞서 가다가 경기 종료직전, 골문을 지키던 경주는 바 짝 긴장하고 있었다. 골이 골대 측면으로 날아왔다. 기습적인 슛팅이었기 때문에 경주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공을 막기 위해 오른팔을 힘껏 뻗으며 튀어 올랐다. 경주의 모습은 마치 고향 첨찰산의 솔 개가 산토끼를 낚아채 달아나는 형사 그대로였다. 그리고 경주의 팔에 의해 공은 튕겨 나갔 다. 하지만 팔에 감각이 없어짐과 동시에 머리에 통증이 와 잠시 동안 기절해 버렸다. 잠시 후 경주를 얼싸안고 아이들의 환호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경주가 눈을 떴을 때, 양호 선생님이 머리에서 피를 닦아 내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영광 의 상처라며 놀려댔다. "야 너, 오늘 대표 선수보다 더 멋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게 튀어 오를 수가 있냐? 그 비법 좀 전수 받자." 주장인 우영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경주에게 말했다. 담임이 옆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있었다. 머리에 상처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 체육 대회는 경주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 강렬한 햇빛 속에서 더욱 푸르게 짙어만 가는 여름. 여름 방학이 되면서 경주는 우영, 영진과 함께 고향집으로 향했다. 우영은 야영을 해 보는 게 소원이었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군용텐트까지 가지고 내려왔다. 경주와 친구들이 집에 내려오자 집안은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씨암탉을 잡는 어머니와 읍내까지 나가서 제과점 빵까지 사 오시는 아버지, 할머니께서는 경주 일행이 집에 도착하 자마자 떡쌀을 담그셨다. 첫날 저녁을 먹은 뒤, 셋은 밤을 새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보내려 했지만 영진의 아 버지가 영진을 집으로 데려가고, 우영과 경주는 평상에 누워 쌍계사 계곡을 따라 첨찰산 정 상까지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에 취해 아무 말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우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렇게 밤하늘이 아름다운 줄은 몰랐어. 사실 길게 뻗은게 은하수란 것도 오늘에야 처음 알게 되었지. 어쩜 저렇게 새까맣고 예쁠 수 있을까?" 경주가 감상에 젖은 우영의 모습이 남사스러운지 반바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야, 너도 분위기 잡을 줄 아냐?" 우영은 경주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짜식, 형님을 무시하려고 드네." 우영은 옆에 누운 경주의 목을 살짝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 형님, 잘못했으니까 쪼금 봐 주쇼. 촌것이 감히 형님을 못 알아 봤다니까요." 엄살을 떨며 누운 채로 두 손을 번쩍 든 경주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애원하자, 우영은 눌 렀던 손을 떼며 다시 누웠다. "경주 네가 항상 패기에 넘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자못 심각해진 투로 우영이 말했다. "......." "네 고향이 널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너의 가족들,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들, 쌍계사 계곡 을 따라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는 무성한 자연림,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으니 말 이야. 그리고 무너질 듯 저렇게 널려 있는 별천지, 서화의 보고인 아름다운 운림산방, 모든 게 널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아." 우영은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경주 또한 하늘에 눈길을 둔 채 듣고 만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둘은 말이 없었다. 문득 경주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기지개를 폈다. "우영아, 우리 오늘 야영하는 게 어떻겠냐?" "나야 좋지. 그런데 야영할 마땅한 곳이 있을까?" 경주는 우영의 어깨를 툭 치면서 저 너머 푸른 달빛을 가리켰다. "아따! 그까짓 건 걱정 마라. 맘만 먹으면 어딘들 야영할 데가 없겠냐?" 우영이 마루에 놓아 둔 텐트를 주섬주섬 챙기고, 경주는 큰방으로 가서 아버지께 야영할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둘은 검푸른 여름 밤길을 걸어 쌍계사 계곡 근처의 풀밭으로 갔다. 둘은 정을 박고 텐트를 세우고 모종삽으로 도랑을 낸 후 든든하게 밧줄을 매고 집에 서 가져간 마늘대로 모깃불을 지폈다. 경주는 집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벗겨 나무 꼬챙이에 끼워 모깃불에 쑤셔 넣고 다시 하늘 을 향해 벌렁 누워 버렸다. 누운 우영과 경주의 눈 속으로 덮칠 듯이 별똥별이 무더기로 쏟 아졌다. "경주야, 저 별들이 지구로도 떨어질까?" 우영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럴거야. 러시아 같은 데서는 운석들이 떨어진다고 하더라."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야, 옥수수 익는 냄새가 죽여주는데! 어디 다 익었는지 한 번 보 자." 우영은 일어나 모깃불에서 나무 꼬챙이를 뽑아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옥수수를 불어 가면서 몇 알씩 입으로 가져가 오물거리던 우영은 경주에게 손짓했다. 구운 옥수수로 배를 채운 그들은 다시 누웠다. 문득 우영이 왼팔을 경주의 배에 얹으면서 말했다. "야, 나는 시골에 오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었는지 아냐?" "뭐가 하고 싶었는데?" "수박 서리를 한 번 하고 싶더라. 하하하." "음흉스럽기는. 요즘도 수박 서리를 간혹 하는데 방범이 예전처럼 허술하지가 않아서 쉽 진 않을 거야." "주인한테 들키는 맛으로 서리하는 거지, 다른 거 있냐? 그깟 수박이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지." "짜식, 그 대신 약속할 게 있다." "무슨 약속?" "주인에게 발각되면 너 혼자 도망가기 없기다!" "이경주, 넌 아직도 날 그런 놈으로밖에 안 보는 거야? 이거 서운한데......." 두 사람은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옆 동네에 있는 원두막으로 숨어들었다. 자 정이 벌써 1시간이나 지난 때여서 주인도 들어가고 원두막은 비어 있었다. 둘은 수박통을 두드리며 잘 익은 것으로 고르는 여유까지 부렸다. 달빛을 받은 수박들이 보기 좋게 번들거 렸다. 우영이가 한 손으로 긴장된 얼굴을 쓸어 내리고 경주를 힐끗 보았다. "야, 이경주!" 우영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경주를 불렀다. 하지만 경주는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수박 꼭지 부분이 억세서 잘 안 끊어진다. 칼 잘 드는 거 있냐?" "그냥, 대충 해라. 몇 통이나 가져가겠다고......." "그래도 이왕 하기로 한 거 자 익은 놈으로 가져가야지." "너, 진짜 서리의 원칙도 모르냐? 지금 이러고 수다 덜다가는 들키는 건 시간 문제야. 알 겠냐?" "시어미니같이 굴긴. 알았어, 임마!" 우영은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속으로는 경주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원두막에 불이 켜졌다. 순간 당황한 우영은 들었던 수박을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도망쳤다. 동네 개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한꺼번에 짖어 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도망가다 보니 경주가 없었다. 그제서야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경주의 모습은 어디 에도 없었다. 수박밭 주인이 개짖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자신의 수박밭에서 불빛이 새어 나 오는 것을 보고는 맨발로 뛰쳐나왔다. "요놈들, 또 어떤 녀석이여? 도대체 하루건너 속 썩이는디 아주 진절머리가 나 부러. 잡히 기만 해 보랑께." 우영이 높에 쌓인 볏짚 뒤로 몸을 숨기고 꼼짝 않고 주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우영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어 우영은 그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떤 놈이냐!" "......." "어허. 그 놈, 누구 친군지 용케 혼자 잘 숨었구만." 우영은 그제서야 경주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짜식, 장난은...... 간이 콩알만해졌다. 지금 놀래키려고 작정했냐?" "겁먹긴." "근데, 너 어디로 갔었냐? 주인 봤어?" "아니 못 봤어. 의리 없는 친구 덕택에 이렇게 뻔뻔하게 안들키고 있잖냐." "그깐 일로 의리까지 들먹이냐, 속 좁게시리. 어쨌거나 수박서리가 스릴은 있다." "어째 할 만하다고 생각한 놈이 대체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다냐?" "나한테 단단히 삐진 모양이구나." "속 좁은 놈 아니니까 걱정 마라." 경주는 서리해 온 수박을 내놓으며 살짝 웃었다. 하지만 수박의 속이 상해 있었다. 경주는 수박을 시냇가로 가져가 멀찌감치 던져 버렸다. "나도 이젠 시골 사람이 아닌가 보다. 상한 수박이나 서리해 오고 말이야." "야, 그래도 나보다 나으니까 괜찮아." 경주가 서있는 자갈밭으로 우영이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들은 텐트에서 자지 않고 자갈밭에 앉아 옛일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그 날 밤을 보냈 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한여름 밤의 정취에 취해 흐르는 시냇물과 반질반질하게 잘 마모된 차돌들의 속삭임 속에 한껏 젖어들었다. 여름 내 푸르던 운동장을 둘러싼 플라타너스가 하나둘씩 단풍이 들고 있었다. 우영과 경주는 토요일인데도 학교 도서관에서 다음 주부터 시작될 2학기 중간 고사 준비 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우영의 집과 경주의 자취방은 가까운 거 리에 있었다. 하교길에는 인적이 뜸하긴 했지만 10여 분이나 단축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평소 에도 후문을 이용했다. 후문을 나서서 몇 걸음 옮겼을 대였다. 아래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날 카롭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경주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우영아, 좀 전에 여자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냐?" "나도 들었어. 그런데 느낌이 안 좋아. 이런 후미진 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래, 가 보자."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여 좀 전에 비명이 들렸던 곳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어둡고 음산한 곳이어서 우영은 겁이 났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경주 의 뒤를 바짝 따랐다. 어두운데다 주위에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 사람이 있어도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곧 검은 물체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몇 걸음을 더 옮기고 나니 막다른 골목에 한패의 건달들이 여학생을 희롱하고 있었다. 경 주와 우영을 발견한 패거리 중의 두 녀석이 옆에 있던 강목을 들고는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개뼈다귀들이야. 샌님들은 일찍 집에 들어가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밤길을 헤매고 다니시나?" 한 녀석이 강목을 휘두르면서 침을 퉤 뱉고는 둘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경주가 앞으로 나섰다. 녀석이 경주의 오른쪽 허리춤으로 강목을 휘둘렀지만 경주가 살짝 피하는 바람에 강목은 시멘트벽에 부딪혀 동강이 났다. 동강난 강목을 내팽개친 녀석은 경 주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나가떨어진 경주를 일으켜 세우며 우영이 나섰다. 그 때 뒤에서 강목을 든 다른 녀석이 우영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우영이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일어난 경주도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날렸 다. 주먹은 녀석의 왼쪽 턱을 명중했으나 잠시 뒷걸음질치던 녀석이 경주를 죽일 기세로 달 려들었다. 우영과 경주는 패거리에 둘러싸여 얼마 동안 몰매를 맞아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범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패거리들은 일제히 도망을 쳤 다. 둘은 몸을 추스르며 겨우 일어섰다. 온몸이 쑤셔 왔다. 피로 범벅된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며 둘은 한없이 웃었다. 생각이 여학생에게 미친 그들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교복은 찢겨 있었고 얼굴에는 퍼렇게 멍든 자국과 상처가 여러 군데 있었다. 코피가 났는지 코 주위에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머리카락이 뒤엉킨 채 기절한 줄 알았던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척 아파 보였다. 여학생의 상처난 몸과 마음을 보며 패거리들에 대해 분노를 느꼈고, 같은 남자 로서 경주와 우영 역시 죄책감이 들었다. 우영이 여학생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집이 이 근처면 저희가 데려다 줄게요." "......." 여학생은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신음을 토한 뒤, 벽 쪽으로 돌아앉아 흐느꼈다. 그녀를 지켜보던 경주와 우영은 난감했다. 좀 전가지도 들리던 방범들의 호루라기 소리는 패거리들 을 잡으려는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경주가 여학생을 부축해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위치 좀 가르쳐 주세요." 그제서야 여학생은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집이 이 근처이긴 한데, 이 꼴로 어떻게 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여학생은 이 말을 하고는 좀 전보다 더 격렬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 지 못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경주는 가방 속에 있는 사분기 납부금 을 떠올리고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근처에 교복집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 여학생은 어느 정도 차분해졌고, 경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 았다. 경주는 우영을 돌아보며 "어쩌겠냐, 지금 교복집으로 가면 되겠지?" 경주가 교복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우영 역시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여학생을 부 축했다. 경주는 교복 윗저고리를 벗어서 그녀를 감싼 다음 우영과 함께 여학생을 부축하고 캄캄한 골목길을 내려갔다. 다행히 교복집이 문을 닫지 않아 여학생에게 교복을 사 입힌 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우영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경주야, 너 그돈 어디서 난 거냐?" 경주가 머리를 만지며 웃었다. "사분기 납부금인데 오늘 낸다고 가져와 놓고 깜박 잊고 안냈어. 아까 그 차림새를 보고 있으니까 집에 있는 여동생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래도 그렇지. 집에는 어떻게 얘기하려구." "어떻게 되겠지.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어려움에 처한 여학생 도와주는 데 썼는데 잘 말 씀드려야지." "적은 돈도 아닌데....... 모르겠다.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옆에 있었으니 까 사실대로 얘기해 줄게." "어디선가 본 듯한데......." "뭐가?" "아까 그 여학생 처음 본 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너, 혹시 기억 안 나냐?" "글세, 아까는 모습이 그래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어. 아까는 나도 낯이 다 뜨거워지더 라."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경주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래 맞아." "왜, 아는 사람이야?" "확실해." "네가 아는 사람이면 웬만하면 나도 아는 사람일 텐데." "맞아, 그 아이야. 중학교 때 내가 반장 턱 낸다고 영진이와 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우 리 집에 가다 영진이와 어떤 아이가 싸움이 붙었거든. 한 녀석이 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길 을 건너다가 차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차 주인의 행동이 기가 막힐 정도로 예의가 없 었어. 그런데 차에 타고 있던 차 주인의 아들하고 영진이가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은 거야. 기분 나쁜 자식이었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다시 나랑 싸움이 붙었는데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아 흔들 때 내 명찰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아주 형편없이 짓이겨 버렸 어. 그 이후 다시 부딪힐 기회는 없었는데 두고두고 잊혀지지가 않아. 그런데 아까, 그여학 생......." "그럼, 아까 그 여학생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러니까 건방지게 내 명찰을 짓밟았던 그 녀석의 여동생이야. 싸움이 벌어지자 울면서 제 오빠를 말리더라구. 오빠란 녀석과 동생의 전혀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기억난다." "그랬구나. 중학교 때면 2년 전 얘기잖아." "그 시건방진 녀석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이름이 조일도였는데......." "그래서 선뜻 교복집에 데려간 거야? 내가 보기엔 너무 인심 쓴 거 같다. 교복 값이 한두 푼도 아니고." "하지만 처지도 안 돼서 그냥 지나치기가 그렇더라." 자취집에 도착하니 어두웠던 골목에 비해 꽤나 밝은 불빛이 경주 방에서 새어 나왔다. 할 머니가 아직도 주무시지도 않고, 경주를 기다리고 계셨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인데 다시 납부금 얘기를 꺼내려니 이만저만 고민이 되는 게 아니었다. "맨날 이렇커롬 늦게 댕겨서 어쩐다냐. 왔다 갔다 힘드닝께 집에서 공부혀그라. 밖에서 먹 는 밥처럼 시원찮은 게 어디 있겄다냐? 먹고 들어왔어도 집에서 다시 먹어야제." "예." "내가 상 봐 올랑께 우선 씻그라." 경주는 할머니께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되얏다. 넘 도와 준 디 쓴 것잉께 신경 쓰지 말그라. 생각혀서 머에 쓰겄냐." "고맙습니다. 할머니, 이번 학기에는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오히려 할머니는 경주의 등을 토닥여 주시면서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셨다. "야가 즈그 아부지를 닮어서 넘이 당하는 건 못 본단께. 암, 내 손주나 된께 그런 일 했 제. 느그 아부지도 배우기만 했으믄 큰 인물됐을 틴디. 니라도 공부 열심히 혀서 큰 인물돼 야 헌다. 암, 내 손주는 그럴 것이구만." 할머니는 가난 때문에 아버지를 가르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기에 경주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어머니가 바쁜 농사일 때문에 학교에 오지 못하자 할머니가 몸소 떡을 해 들고 학교를 찾 아오셨다. 할머니는 담임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는 놓을 줄을 몰랐다. "우리 아들이 농사일 때문에 바뻐논께 선상님을 찾어뵙지 못혀서 이래 지가 대신 와 부렀 지라. 경주가 바른 길로 가게만 선상님께서 붙들어 주셨으면 좋겠구만요. 이건 선상님들 드 시라고 인절미 쪼끔 해 왔응께 노나 드셔요이. 말이 나왔응께 말이제 우리 손주 놈은 사원 리만이 아니라 우리 면에서 거는 기대가 엄청 크제라. 내 손주라서가 아니라 문중의 대들보 지라. 이 놈 땜에 이 늙은이도 조상 대할 면목은 생겼어라. 암튼 경주를 담임 선상님께 맡겨 부요. 저는 선상님만 믿고 이만 물러 갈랑께 잘 부탁 드리구만요." "예, 경주 할머니." 담임이 고개를 숙이며 할머니의 팔을 부축하여 교무실 앞까지 배웅하셨다. 그렇게 교무실을 나서는 할머니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경주는 할머니의 손 을 잡고 교문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느덧 그들은 다시 입시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고 너나할것없이 눈에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우영과 경주는 부모님들 기대도 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뜻도 있었기에 함께 서울대 법 학과에 지망했고, 영진은 같은 학교 국문과에 지망했다. 대학 입시를 치러야 하는 경주를 위 해 어머니는 몇 주전부터 서울로 올라오셔서 경주의 건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경주는 입시가 가까워오자 의외로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틈이 정리해 둔 노 트들을 살피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입시 날이 왔다. 경주는 배부되는 시험지를 받아 들고는 답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입해 나갔다. 무엇보다 침착성이 시험을 좌우한다고 경주는 생각했었다. 겨드랑이세서 땀이 나는 것을 느껴며 마지막 시간까지 마친 경주는 입이 터질 것처럼 늘 어지는 하품을 해댔다. 교문을 나서는 경주의 모습은 기운이 넘쳐 보였다. 시험을 마치고 고향 하늘을 벗삼아 수 없는 별을 헤며 즐겁게 보내는 동안 은근히 걱정하 는 식구들의 눈빛을 대할 때면 자신도 시험결과에 대한 불안감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결국 우영과 경주는 나란히 합격했지만, 영진은 안타깝게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보다 영진 과 친동기처럼 지냈던 경주는 가슴 한켠이 시렸다. 그리고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모든 면에서 경주가 앞서 가도 아무 불만 없이 우정을 지켜 주었던 영진이었기에 경주는 혼자서 만 대학에 가는 것이 미안했다. 영진은 광주로 내려가 재수를 시작했고, 경주는 서울에서 젊음이 가득한 대학 생활을 하 게 되었다. 만남을 위한 준비 대학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과 낭만은 경주를 젊의 혈기로 한층 더 불붙게 했다. 영진의 낙방이 언제나 가슴 한켠에 고여 있었지만 우정을 굳게 믿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경주는 서울에서 자취 생활만 벌써 4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항시 옆에서 챙 겨 주신 덕에 고등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대학에도 무난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고향집으로 내려 가셨고 이제는 경주 혼자 자신 의 생활을 찾아야 했다. 혼자서 자취 생활을 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대학 생활은 고등 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짜여진 시간 안에서 수동적이기보다는 적극적이고 매사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태반이었다. 저녁 무렵 경주가 투박한 자물쇠를 따고 들어설 때면 이제까지 자취 생활을 편하게 돌봐 주셨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우영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대학 학보사의 수습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경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 아쉬웠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대학 학보사로 들어가서 열심히 뛰어 다니는 우영을 보면서 경주는 어쩌면 그에겐 법조계 보다는 언론계가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주는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경주가 야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영 진이 때문이었다. 영진이 고등학교 교과서를 붙들고 또 한 번 입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경주도 친구로서 뭔가 그 고충을 함께 할 만한 일을 찾다 보니 야학 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이렇다 할 교육적이 열의도 없이 시작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밤마다 끝없이 정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 사로서의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앞으로 자신이 가야할 길에 힘찬 의지를 굳힐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경주는 야학에서 영어와 사회 두 과목을 가르쳤다. 공부하러 오는 학생의 대부분이 근처 공장 근로자들이었다. 나이도 대중이 없었지만 대부분이 스무 살 안팎이었다. 경주와 같은 나이 또래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배우러 오는 학 생들은 너나할것없이 경주에게 항상 예의를 갖추고 배움에 최선을 다했다. 경주는 중학 과정에서는 영어를 가르쳤고, 고등 학교 과정에서는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어떻게 해서든 이겨 보려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강의에 열중하는 학생 들을 볼 때면 더없이 뿌듯함을 느꼈다. 경주는 그런 학생들을 보면 진도에서 열심히 농사일 을 하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항상 아버지가 귀가 닳도록 일러주시던 배움이라는 단어를 새겨 보았다.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경주야! 니는 꼭 알아 둘 것이 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니는 면서기라도 혀 먹어야 한 단께. 공무원이 최고랑께. 거, 머시냐 우리 땅처럼 정직한 공무원 말이여, 알았제?' 밥상에 앉으면 할머니 앞에서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이 언제나 귓가 에 쟁쟁하게 울려 왔다. 아버지는 유독 경주에게 배움을 강요해 온, 말못할 이유가 있었다. 경주가 중학교 입학하 던 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하루는 아버지가 술에 만취되어 대문 앞 경운기 옆에서 할머니 의 손을 꼭 붙잡고 흐느끼고 계셨다. "엄니, 엄니, 지들이 농군을 깜봐도 어지간하제라. 못 배운게 설움이라먼 농토맨큼은 얕보 지 말어야제. 시상에 어디 농협 문 높아서라도 농사 지어 먹고 살겄소. 지는 챙피혀서 더 이 상은 농협을 못 들어가제라." 힘없는 아버지의 서글픈 목소리가 이어지고 지켜보고 있던 식구들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 다. "애비야! 훌 털어 버리랑께. 몹쓸 것들이제, 이 근실한 농군을 요 꼴로 맨들어 불면 어쩌 라고 그런다냐? 당체 모르는 것들이여. 농협이라는 것이 농민을 위한 것이제. 머시냐 즈그 직원들만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랑께."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던 할머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식구들도 말없이 할머니 를 따라 마당 안에 들어설 뿐이었다. 나중에 이장을 통해 알고 보니, 그 날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여름 보리 베기를 끝내고 웃거름을 주던 중, 복합비료가 부족하여 경운기를 몰고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농 협에 들어섰는데 농협 군지부에서 간부들이 올 것을 대비해 현관 바닥 청소를 하고 있던 버 르장머리 없는 여직원에게 출입을 제지당했던 것이다. 여직원은 아버지에게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 붙였다. "아니, 이것 보세요. 그렇게 하고 어딜 들어오세요. 나가세요. 지금 여기 청소해 놓은 거 안 보이세요?" "......." 아버지는 여직원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비료를 빨리 사 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왼발을 현관 바닥에 내딛었다. 아버지가 오른발을 들어올리려던 순간 아버지 앞에 있던 여직원이 들고 있던 물바가지로 물을 퍼부으며 달려들 었다. 순간, 아버지는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여직원은 넘어진 아버지를 보고도 냉랭한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먼 일이랑가? 사람 하나 잡겄다이." 아버지는 얼른 바닥에서 일어섰다. 바지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다 젖어 아랫도리가 축축했 다. "아저씨는 눈치도 없이 왜 그렇게 뻣뻣하게 서 계세요? 내가 뭘 하는지 빤히 봤으면서. 그러니까 그렇게 변을 당하셨죠. 전 몰라요." 여직원은 아버지에게 도리어 덤빌 기세로 대꾸했다. "시방 머라는 소리랑가? 밭에서 일하다가 농협으로 비료 사러 온 사람에게 눈치라니....... 당체 알다가도 모르겄네." 하지만 아버지는 역정 한 번 내지 않고 자신이 농협에 오게 된 이유를 차근차근 말했다. "오늘 군지부에서 지부장님이 오신단 말이에요." 여직원은 아버지에게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일이 받아쳤다. "지부장이 오는 건 내가 알 봐 아니랑께. 여그는 우리 농사꾼이 이용하는 농협인께 비료 만 사 갖고 갈 것이여. 그란께 창구나 좀 들어가게 혀주쇼이." "아저씨에겐 비료 못 팔아요." "아니 머시라고 혔어? 지금 비료를 못 준다고 혔남? 얼레, 농협이 지부장 모시는 일만 혀 는 곳인가 보제? 젊은 양반, 잘 알란께. 농민이 있어야 지부장도 있는 법이여. 예끼, 이 사람 아!" 그러나 농협 직원들 중 어느 누구 하나 나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여직 원과 아버지의 실랑이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농협 직원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이웃 마을 농사꾼들의 도움으로 아버지 는 힘없이 농협을 나왔다. 평생 땅 하나만 믿고 흙에서 피땀을 흘린 대가로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 경주는 야학 교사를 하면서 부모님의 희생을 새 삼 깨달을 수 있었다. 배움이 절실한 아이들에게 부족하지만 경주도 야학 선생으로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이 그의 지친 피로를 풀어 주는 유일한 힘이 되었다. 법과대 1학년 이수 과목이라고 해 봐야 개론과 교양 과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경주는 남 는 시간의 대부분을 야학에서 보냈다. 가끔씩 영진에게서 편지가 왔다. 경주도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와 영진에 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가 오갈 때마다 경주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과연 자신이 영진에게 도움을 줄 수 있 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야학의 아이들 얘기 외에 다른 쓸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분이니 적분이니 함수니 하면서 고등 학교 교과서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무 엇보다 영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전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렇 게 고민하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고 거짓되게 느껴졌다. 진정한 친구라면 그 무엇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서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해 오 던 경주였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경주는 영진을 더욱 깊이 떠올리게 되었고 야학을 찾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용기를 갖을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주었다. 1학기 말 시험기간이었다. 다음 날 전공 과목 시험 준비를 위해 학교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린 경주는 우연찮게 학교 신문을 배부하고 있는 우영을 만났다. 도서관 현관 계단으로 깡마른 한 남학생이 무거워 보이는 신문 뭉치를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우영이었다. 커피를 뽑아 마시고 있던 경주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우영이 고개를 들어 경주와 눈이 마주쳤 다. "경주야, 오랜만이다." 우영은 난데없이 나타난 구세주가 경주임을 알고 그 특유의 소년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 다. "이게 누구야? 학보사 기자가 기사 찾아다닐 생각은 안 하고 이런 잡일만 하는 거냐?" "모르는 소리 마라. 이게 바로 수습 기자의 비애라는 거다. 하긴 야학은 수습 기간이 없겠 지. 처음엔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이 짓도 한 달만 하면 도사가 된다." "수습 기자를 1학기 낸 하냐?" "그래, 이제 2학기부터는 나도 정식 학보사 기자가 된다구." 경주는 그제야 우영에게 안쓰럽다는 듯이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도서관 현관에 신문 뭉 치를 놓아 둔 우영은 경주에게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회포라도 풀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수습 딱 지 떼기 전이라 행동을 내 맘대로 못 한단다. 가 봐야겠어. 언제 내가 먼저 연락할게." "그래, 언제든지 연락해라. 기운 내고, 열심히 해라." "그래, 고맙다." 우영은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경주는 우영이 내려간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도서관 열람실로 들어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캠퍼스에는 마냥 그칠 줄 모르는 따가운 햇살로 그 열기가 좀체 가 시지 않고 있었다. 야학도 3주간의 방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야학에서 교감이나 다름없던 경 주는 조그만 메모지를 교무실 창틀에 끼워 놓고는 교무실을 나섰다. 인간은 패배하였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 닉슨 며칠 전 잡지를 읽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명언이었다. 경주는 그 글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역경 속에서 패배하더라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꿈꿔 오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경주는 진도로 내려가는 길에 광주에 들러 영진을 찾아갔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학생들 이 학원에서 나왔고, 그 틈에서 영진이를 발견했다. 현관 모퉁이에서 1시간을 넘게 기다렸 다. "영진아!" "어, 경주 니가 웬일이여? 연락도 안 혀 불고 광주까지 다내려와 부렀다냐." "임도 보고 뽕도 따 불라고 와 부렀제." "임이라고 혔냐? 니가 벌써 생긴 거여? 그라믄 얼른 소개를 시켜야 안 허겄냐?" "짜식, 임은 무슨 임이겄냐. 너 보려고 귀하신 이 몸이 광주까지 온 거 아니겄냐. 하하하." "싱겁게 노네. 임도 있으면 데리고 오제. 꽃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디." 영진이 한 방 얻어맞았다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짜식, 그란디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것이다냐? 아니먼, 가이네들 꽁무니나......." "재수생이 무슨 시간이 있다고 연애질이겄냐, 연애는....... 공부 하나 제대로 하기도 힘든 디. 잔소리를 나중에 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잔께." "암, 가야제." 영진이 근처의 막걸리집을 향해 먼저 걸어갔다. 습기가 바닥 가득히 배어 있는 허름한 막 걸리집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구수한 파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약간의 취기가 올라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삼겹살을 굽는지 고기 타는 냄새가 막걸리집안 가득했다. 그리고 프라이팬 위의 먹음직스런 파전이 구수한 냄새와 함께 배고픔을 더했다. 경주는 영진을 기다리며 허기졌던 배에서 서서히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 여 자가 영진을 보자 등을 툭 치면 반갑게 맞았다. "워메! 어서 와, 영진 학상. 요즘은 통 얼굴도 안 보이고 어디 딴 데라도 갔다 온 거여?" "아니어라, 계속 학원 다녔지라. 모의 고사가 있어서 한동안 못 왔을 뿐이랑께라." "시방 전 부쳤는디 그것부터 내 놓아야겄제?" "제 친구 놈이 저 본다고 서울서 광주까지 왔응께 푸짐허게 장만해 주셔라." "그라요? 친구도 잘생겨 부렀어이." 영진의 말에 주인 여자는 경주를 한 번 쳐다보았다. "다 끼리끼리 다닌다고 허잖아요, 하하하." "영진 총각도 여전허네 그려. 뭐부터 준당가? 두 총각들, 밥은 먹었는가?" "아직 안 먹었어라. 경주야, 여기 선지국 괜찮은디 그거에 막걸리 시키자." "아주머니, 여그 상에다 먹거리 먼저 올려 주시요이." "안주는 안 허고?" "아까 파전 주신다고 했음시로 먼 재촉이라요. 그것 먼저 먹고 나서 또 시킬 틴께 걱정 마셔라." 주인 여자는 50이 조금 안 되어 보였고 나이에 비해서 곱게 늙은 얼굴이었다. "너 여기 자주 댕기냐?" "머리도 식힐 겸해서 친한 애들하고 가끔씩 들른단께." 영진의 담담한 말투가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경주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오늘은 광주에서 자고 가는 것이제?" 확인하듯 영진이 물었다. "그라제. 내가 누굴 믿고 이 시간까지 니를 기다렸겄나?" "허기사, 어제 같이 방 쓰던 녀석이 여수로 내려가 부렀어. 삼수생이었는디 1년 재수하고 또 객지에서 삼수까지 허려니까 몸이 부쳤나 보제. 며칠 앓더니 쉬어야겠다고 함시로 어제 훌쩍 떠나 버리더랑께. 그런 것 보면 지금 나 허는 건 아무것도 아니여. 이 정도의 고생은 견딜 수 있구만." "그러고 본께 너 많이 말랐구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녀?" "무리까지는 아니고 넘들 하는 만큼 해서는 안 된께 쪼끔 더 열심히 하는 것뿐이제. 너무 걱정허지 말그라.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긴단 말이여.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랑 붙들어 매 란께." 주인 여자가 파전과 막걸리를 내오자 영진이 사발을 내밀며 먼저 한 잔을 따랐다.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며 진동했다. 안주라고는 깍두기 한 접시와 파전 한 장 지진 것이 고작이었다. 첫 잔을 깨끗이 비운 경주는 깍두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영진에게 잔을 권했다. "야, 너말이여 대학 가더니 술꾼 다됐다. 학교에서 법이네, 논리네 하고 술 마셔 대다가는 몸만 상헌다." 잔을 받아 든 영진도 단숨에 들이켜고는 파전을 입 속에 넣었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 려는 영진에게서 경주가 주전자를 빼앗았다. "너, 사람 앞에 놓고 그러기냐?" "니가 어떻게 허는가 보려고 그랬제. 알었으면 얼른 따르란 말이여." "어, 너 이젠 친구 놀릴 줄도 알고 많이 커 부렀다." 경주는 자신의 잔까지 마저 채운 뒤 영진에게 건배를 했다. 둘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라곤 고향에 관한 것과 과거의 추억뿐이었다. 경주는 영진과 대학 생활 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영진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시방도 야학 선생하는 거 맞제?" "응, 지금 야학이 방학이라서 내려왔제." "......." 영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경주는 영진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참 젊음을 발산해야 할 나이에 학생들로 빽빽이 들어찬 학원 강의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 야만 하는 답답함이 경주에게 전해져 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영진이 말을 꺼냈다. "거, 머시냐 며칠 전에 미자 만나 부렀다. 진도 내려갔다 오는 길이라고 함시로 참외 몇 개 놓고 가더라. 미자도 문학 동아리 들어가서 재밌게 생활한다고 야단이랑께." "자주 만나고 그랑께 좋겄다. 한 도시 아래서 지낸께 서로힘이 되고 말이여." 경주는 말을 꺼내 놓고도 가슴이 뜨끔했다. 우정에는 시간과 거리가 문제가 안 된다고 평 소 생각하던 자신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막걸리 두 주전자를 마시고 나서야 경주와 영진은 그 곳을 나섰다. 영진이가 살고 있는 하숙집 대문에 들어서자 마루 밑에 웅크리고 있던 강아지가 못 보던 얼굴 때문인지 숨이 넘 어 갈 듯 짖어 댔다. 술에 취한 영진이 강아지 쪽으로 다가가 한 번 발길질을 하자 강아지가 다시 마루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주는 한쪽으로 잘 개켜진 이부자리를 펴며 영진에게 말했다. "영진아, 너랑 나랑 이렇게 같이 잠자는 게 얼마 만인지 알겄냐?" "그란께 말이여, 그게 언제쯤이었다냐?" "고등 학교 2학년 10월이었던 것 같제. 둘이 추석 쇠고 올라와서 함께 했응께 말이여." "시간 가는 게 금방이랑께. 실감이 안 나제?" 영진은 대답을 끝내기가 바쁘게 입맛을 다시며, 고한 잠에 떨어졌다. 경주는 일어나 불을 끄고, 벽에 몸을 기댄 채로 곤히 잠든 영진을 바라봤다. 다음 날 날이 밝자 경주는 영진을 위해 북어국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진도를 내려온 경주는 그 동안 도와 드리지 못했던 농사일을 거들면서 나머지 방학을 보 냈다. 시골은 이제 막 자라는 벼이삭들 사이에서 피 뽑는 일이 한창이었다. 논일에 서툰 경 주는 발을 디딜 때마다 푹 꺼지는 논밭에 익숙지 않았고, 사실 피와 벼이삭을 제대로 구분 하기도 어려웠다. 첫날은 실수로 꽤나 많은 벼를 뽑았다. 아버지는 가볍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어느 새 다 자란 아들을 보면서 든든한지 입가에는 흐뭇함이 가실 줄 몰랐다. 장마가 오기 전에 살충제를 뿌려야 한다면서 아버지는 고무다라이 가득 농약을 풀어 살포 기로 한나절이나 넘게 농약을 하셨다. 가끔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하얀 농약 알갱이들이 안개처럼 들녘 저 편으로 날아가곤 했 다. 경운기 곁에서 호스를 빼 주던 경주는 아버지가 논가로 잠시 쉬러 나오자 기계를 만졌 다. "아버지, 제가 농약뿌리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며 당치도 않는 소리 말라며 경주를 말리셨다. "아서라, 젊은 놈이 농약 마셔서 좋을 일 웁다. 너는 그냥 여그서 호스만 안 엥키게 풀어 주믄 된다이." 논두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전보다 많이 야위셨다. 아버지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마저도 아버지의 나이처럼 휘어 바람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경주는 팔을 걷어붙이고 살포기를 손에 들고 논으로 들어섰다. 저족에서 아버지가 그만두 라고 하시며 달려오셨지만 경주는 손을 흔들며 사포기를 흔들어 댔다. "아버지, 그냥 이렇게 좌우로 뿌려 주면 되는 거죠?" "그냥 놔 두래도 그런다냐. 그라고 마스크와 이 수건으로 입을 꼭 동여매야 허는디." 아버지는 흡족한 얼굴로 경주에게 수건을 건넸다. 신작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이장 이 경운기 앞에 멈춰 섰다. "큰아들, 경주 아니어라? 언제 집에 왔다냐? 학교 댕기면서 언제 농사일은 배웠냐. 인자는 형님 손도 덜어 주고 참말로 보기 좋구만이라." "다들 하는 일인디 머 별날 것 있겄는가." "올해는 벼멸구가 지독하다는디....... 형님 저 가 볼라요." 농약이 거의 끝나갈 때쯤 어머니와 초등 학교에 다니는 막내 승주가 백구와 함께 새참을 내왔다. 승주는 논에 들어가 있는 경주를 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주도 승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농약을 다 하고 난 후 경주는 아버지와 함께 논 옆에 있는 개울로 갔다. 아버지는 웃옷을 벗으시며 경주 앞으로 등을 내밀었다. "나도 우리 큰아들이 혀 주는 등목이나 한 번 혀야겄다. 어떻냐?" 경주는 웃으면서 얼른 상의를 벗었다. "아들이 아버지 등목해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는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 가득 물을 퍼서 아버지의 등허리로 시원하게 부었다. "어, 참마로 시원하단께." 아버지는 입으로 내려오는 물을 뱉어 내는지 연신 푸푸 하면서 뱃가죽을 문질렀다. 등목 을 마친 아버지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한 손으로는 경주 팔을 잡아 당겼다. "인자 너도 등목혀야제." 경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메리야스를 벗으며 아버지와 같은 자세로 엎드렸다. "아이고 이놈, 어째 속살이 가이네 맨키로 흐옇다냐. 이 참에 확실하게 태워 갖고 가야 쓰 겄다. 이래 갖고 쓰겄냐?" 아버지는 아들의 등허리를 한 번 찰싹 때린 뒤 물을 한 바가지 끼얹고는 이리저리 문질러 댔다. 경주는 자신의 새하얀 살결이 부끄러웠다. 종일 땡볕에서 지내는 아버지는 평생 속살마저도 희어질 새 없이 논밭으로 돌아다니셨다. 그들은 기분 좋게 등목을 하고서 어머니가 차려 놓은 새참 곁에 앉았다. 어머니는 밥공기 와 국 사발을 건네주며 경주가 대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인자는 경주가 다 커 갖고 농약도 하고, 당신 편하겄쇼이." 아버지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입안에서 숟가락을 뺐다. "농군이 농사를 지어야제, 공부허는 놈 불러다가 농사짓게 하믄 쓰겄는가. 이것은 다 경험 으로만 묻어 둬야제, 천직으로 생각하믄 안 된단께. 저 구산리 이장네 아들은 전문 대학을 보내 논께 제대로 댕기지도 않고 연애짓만 하다가 당구장 한다고 내려와 부렀지 않은가. 너 는 딴 생각말고 착실허게 공부혀서 판검사되어야 쓴다." 말을 마친 아버지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경주는 아버지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다. 또 한 법조계에 대한 남다른 신념이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논일이 한가해지면서 경주는 어머니를 따라 콩밭에 김을 매러 가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럴 때마다 사내는 밭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서 끝끝내 말렸지만, 경주의 고집도 만만치 는 않았다. 경주는 어머니보다 앞서 잎대에 제법 힘이 잡히기 시작한 참깨 사이의 도랑으로 들어가 김을 매다가 무수히 많은 참깨 대를 밟곤 하였다. 경주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머 니는 호미 잡은 손으로 살레살레 흔들며 웃었다. "어머니 말대로 밭일은 사내가 할 일이 아닌가 봐요. 내 마음대로 손에 착 달라붙지 않네 요." 옆에서 같이 호미질을 하던 김제 댁이 모자를 다시 매만지며 한 마디 거들었다. "경주는 어째 저렇커롬 싹싹헌지 모르겄어. 성님은 저라고 듬직한 아들 두어서 좋겄어라." 김제 댁은 유난히 경주를 귀여워했다. 어느 날 저녁 소 꼴을 먹이던 경주는 사천 방죽 여 산 밑자락에 있는 언덕빼기로 소를 몰 고 갔다. 어려서부터 꼴을 뜯길 때면 항상 찾던 곳이었다. 비탈 밭에서 늘어진 호박 덩굴이 맛난지 뜯고 있던 소가 갑자기 콩밭으로 뛰어들었다. 밭 둑에 앉아 있던 경주는 놀라 그곳으로 달려가 소를 끌고 나왔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밭은 얼마 짓이겨지지 않았다. 문듣 중학교 때, 꼴을 먹이다가 미자네 콩밭에 소가 뛰어든지도 모르고 밭둑에 누워 있다 가 미자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달려가 빌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미자는 미안해하며 경주를 두둔해 주었다. 경주는 미자를 생각하며 비탈 밭에 앉아 있다가 해가 고개를 꺾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주는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소는 원래 겁이 많기 때문에 사방으로 땅거미가 깔리면 마구 울러 댄다. 그래서 소 꼴을 먹일 때에는 항상 해지기 전에 집으로 와야 했다. 경주는 대낮이면 마루로 나와 할머니와 함께 수박이나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한담을 하며 보냈고, 아침저녁으로는 소를 몰고 산이나 들로 나섰다. 소를 모는 사이에도 경주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가끔씩 어머니의 참을 챙겨 밭으로 갈 때도 있었지만 한여름이 되면 농촌은 오히려 더 한 가해졌다. 이렇게 3주를 보내고 경주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3주 동안을 고향에서 보내고 다시 서울로 향하는 경주의 얼굴은 제법 거뭇하게 그을려 있 어 건강해 보였다. 여전히 야학에 오는 아이들의 눈은 촉기가 가득했고, 새 학기도 풍성한 가을처럼 야망으 로 가득 차서 시작되었다. 1학기 때보다는 전공 과목이 몇 개 추가되어 야학에 있는 시간보다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영은 2학기가 시작되면서 수습을 마치고 기자로서 더욱 분주하게 활동 하기 시작했다. 경주는 우영을 찾아 종종 학보사에 들르곤 했다. 우영은 경주가 찾아갈 때마다 취재와 잔 심부름에 쫓겨 친구 대접을 제대로 못해 미안해했었다. 그런데 어느 금요일,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영이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영이 아니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냐?" "야, 그래도 명색이 기자인데 이런 자잘한 신원 파악이야 기본 아니겠냐." "학보사에 들어가더니 뱃심이 더 좋아졌구나. 배 나온다 힘빼라." "원 녀석, 싱거운 농담도 여전하구나. 오랜만에 시간을 냈는데 술이나 한 w나 하자. 어 때?" "뭐 공짜 술이라면야 언제든 환영이지. 그런데 저녁도 제공해 주냐?" 우영은 배시시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내어 허리춤에 올렸다. "짜식, 술꾼 티 엄청 내고 잇네. 어디 가까운 주점이나 가서 소주나 걸치자." "좋아." 둘은 근처 주점으로 들어가 요기가 될 만한 안주를 시켜 놓고는 소주를 몇 잔 마셨다. 우 영은 경주의 잔을 채우며 고민에 찬 얼굴로 말했다. "경주야, 나 생각 바꿨다." 경주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언론이란 생각이 든다. 판사와 기자라! 참 어울리는 콤비 아니냐?" 경주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우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조금은 당황스러웠 다. 함께 법조계로 가자던 친구에게서 언론계에 몸담고 싶다는 말을 듣자 다소 맥이 풀리는 건 사실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은데, 너희 아버님께는 말씀드린 거냐?" "아버지 설득시키기가 제일 힘들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허락해 주셨어." "그래?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고 본다. 어쨌든 길동무가 하나 준 것 같아 정말 섭섭하다." "걱정 마, 너 g는 일에 내가 지원을 할 테니. 나야 너의 영원한 후원자 아니냐." "네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니 눈물이 다 난다. 하하하, 이거 이제부터는 박 기자님 이라고 불러야겠네. 박 기자님, 판사 후보생 잔도 받아야죠?" "그러지." 둘은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실컷 했다. 경주는 우영을 이 해할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느꼈지만 우영은 결코 법조계에 맞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스 스로가 바라는 길도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를 위한 우영의 관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 히려 지금, 방향을 전화하는 우영의 선택이 어쩌면 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적성에도 맞지 않는 법조계 인사가 되는 것보다는 언론계에 투신해 우영의 기량을 한껏 발휘하는 것이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여느 때보다 많이 취한 우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건강하게 살아 숨쉰다. 그래서 이 일이 내가 평생 업으로 삼아야 할 일이란 생각이 간절하게 들더라구. 너는 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나 는 참 언론인으로 공정하고 진실 된 여론을 이끌어 가면 그만 아니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입으로 가져간 술잔을 가슴께로 들어붓던 우영은 탁자에 고개를 떨구 고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지만 둘은 친구였다. 경주가 영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듯 우영과도 끊을 수 없는 끈끈한 의리로 맺어진 지정한 친구였다. 2학기 중간 고가가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가 대학생활에서 '낭만의 꽃' 이라지만 그보다는 축제 마지막 날의 집회로 인해 밀려오는 허무함이 오랜 후유증으로 마음 깊이 자 리잡았다. 그래서 경주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좁은 학원 강의 실에서 대학을 들어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책과 씨름하고 있을 영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거의1주일 가량 수업이 없게 되자 경주는 영진이 보고 싶어 그 길로 광주로 향했다. 영진 은 그 사이 더 파리해져 있었다. 토요일이라 미자와 연락이 닿아 함께 만나게 되었다. 금남로에서 만난 그들은 갈 곳을 탐색하다 무등산으로 향했다. 미자가 증심사 가는 길목 에 괜찮은 탁주집이 있다면서 그곳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탁주집이라기보다는 보리밥집 이라고 하는 게 더 옳았다. 갖가지 푸성귀 무친 것과 몇 가지 젓갈들을 맛깔스럽게 내놓았 다. 술이 나오기 전에 시원한 된장국과 보리밥이 나오고, 얼마 후에 탁주가 나왔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것인지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경주는 한 잔을 들이켜고는 미자에게 잔을 건넸다. "니 못 본 사이 많이 이뻐졌다. 애인이라도 생긴 거다냐?" "먼 소리여, 나야 원래 인물값 좀 혔잖아. 안 그렇다냐?" "영진아, 미자 얼굴만 이뻐진 줄 알았더니 뻔뻔한 것도 그냥 넘기지 못하겄다." 영진은 미자를 힐끗 쳐다보며 탁주를 한 잔 더 마셨다. "공주를 알어보긴 허네. 그랑께 니들이 미모만은 인정하는 것이제. 다행이다야." "야, 우리가 이렇게 셋이서 만나는 거 아마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이제?" 셋이서 함께 모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얘기는 중학교 동창들의 근황과 들려오는 은사님 소식이 고작이었지만 이런 자리가 세 사람에게는 얼마나 그리웠는 지 모른다. 도회지 아이들이야 유치원, 초등 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다 제각각이지만 시골은 그렇지가 않았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시골 아이들은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마치고 도시로 고 등학교를 가거나 취업을 했다. 저마다 생활에 쫓기고 학업에 쫓기다 보니, 그 코흘리개 적 친구들은 한 장의 희뿌연 흑 백 사진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취업 나간 친구들은 명절 때가 되더라도 저 희들끼리 모이는 듯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소식 외에는 달리 오가는 얘기가 없 지만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게 셋은 흐뭇하게 저녁을 먹고 무등산을 내려왔다. 학교 정문 근처에서 동생과 자취를 하는 미자를 데려다 주고 영진과 경주는 시내로 나왔다. 묵묵 히 걷기만 하던 영진이 입을 열었다. "경주야, 지금 생각 같아서는 지방에 있는 아무 대학이나 시험보고 싶은 맘만 생기는디 어쩐다냐. 앉아서 혀는 만큼 제대로 점수도 나오지 않고, 그냥 마음 편하게 묵고 시험보고 싶다." "......." 그렇게 힘들어하는 영진에게 경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1시간 남짓 시내 주변을 서성거리고 나서야 영진의 하숙집으로 왔다. 경주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고, 영진 또한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어떤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고, 그렇게 꼬박 밤을 세웠다. 경주는 아침을 일찍 먹고 영진의 하숙집을 나섰다.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영진을 들어가 라며 떠밀던 경주는 힘없이 지쳐 있는 영진의 눈빛을 외면하며 골목을 빠져 나왔다. 차창 너머로 황금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그 풍경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만 같았다. 운림산방에 이른 경주는 곧장 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정오가 다되어 가 는 시간이었지만 동네는 짖어 대는 개 한 마리 없이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집집마다 추수 준비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란 생각이 미치자, 경주는 들로 가야 할 지 집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며 걷다보니 어느 새 집 앞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김제 댁과 어머니가 나란히 찬통을 이고서 막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나타난 경주를 보고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면서 뒷걸음질쳤다. "학교 수업은 어쩌고 내려왔다냐?" "죄송혀요. 연락허고 내려오는 건디. 지금 축제 기간이라 수업도 웁고 혀서 집안일이라도 거들려고 내려왔어라." 김제 댁이 기특하다는 듯이 경주를 올려다보며 손에 가득 든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이고 워째 저리 속이 깊다냐. 머시마는 머시마여." 경주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김제 댁이 들고 있던 찜통을 받아들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추수는 얼마나 남았당가요?" "머 그저께부터 시작혔는디, 모레나 끝나려나 모르겄다." "그라믄, 여기에 있음서 추수하는 거 거들다가 올라가면 되겄제라." 멀리서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는 논두렁에 찜통을 내려놓고 탈곡기 쪽으 로 달려가 사람들을 불렀다. "아버지, 점심 가져왔어라." 경주의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본 아버지의 입가에는 뿌연 먼지 속에서도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는 머리에 두른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 냈다. "내려온다는 연락도 없이 이라고 불숙 내려와 부렀냐. 서울에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 제?" 그 때 저쪽에서 남동생 건주가 달려왔다. "형, 머땜시 형이 다 내려와 부렀다요?" "광주서 언제 내려왔냐?" "응, 어제 중간 고사도 끝나 도와 드릴라고 내려왔제. 민주누나는 그저께부터 감기 증상이 있더니만 어제는 아예 앓아 누웠제. 그래서 혼자 내려왔단께. 형, 몸이 워째 더 마른 것 같 다냐?" "짜식, 별걸 다 걱정하냐." 경주네 집 형제들은 다섯이다. 시골집 애들치고 적은 숫자이긴 했지만 남매들 간의 우애 가 좋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제일 큰애가 경주, 둘째가 광주에서 고등 학교에 다니는 민주, 셋째가 건주와 희주 그리고 막내가 승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큰놈 경주에게 부모님과 할머니의 사랑이 남달랐다. 큰자식에 대한 기대감 도 있었겠지만 늘 겸손하고 무슨 일이든 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성적도 상위권이 었으며 집안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장남의 자리를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경주가 나머지 형제들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들은 오히려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사춘기 때 셋째 건주가 잠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섯 형제 모두 성격이 밝고 긍 정적이라 집에서도 특별히 잔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사춘기를 무난하게 지낼 것 같았던 건주는 큰형에게 풀어놓지 못할 응어리를 가슴 에 담아 두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높은 산처럼 보이는 큰형 앞에서는 자신이 너무도 보잘 것 없이 작은 존재로만 느껴지는 위태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런 위태감도 잠시뿐이 었다. 산등성이로 줄기차게 뻗어 있던 큰형이 건주를 어느 샌가 보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외따로 떨어져 나간 듯한 건주를 다시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건주의 마음을 읽은 경주는 무리인 줄은 알았지만 주말을 이용해 고향으로 내려 왔다. 경주는 시험기간을 피해서만 겨우 고향집에 내려올 수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큰 형으로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경주는 진도에 도착해서 바로 건주 학교로 향했다. 시험기간이라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건주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건주는 도서관 출입문을 열고 터벅터벅 걸어 나오 다가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큰형을 보았다. 서울에서 입시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진도로 내려온 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꽤나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는지 지쳐 보였다. 건주는 우선 도서관 기둥에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 도서관 쪽문을 이용해 도망치 듯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히 도망쳤다. 도서관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경주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건 주의 단짝 권영이가 졸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권영아!" 목소리를 최대한 줄여 재빨리 불렀다. 권영은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고, 아예 책상에 엎 드려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학생이 경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경주 옆으로 다가왔다. "저, 누굴 불러 드릴까라?" "어, 저기 왼쪽 창가 두 번째 학생 좀 불러 주면 고맙겄다." "임권영이 말이제라? 그라믄 잠시만 기다려 볼란가요?" "여기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랑께, 그렇게 혀주라." "그러제라." 잠에서 덜 깬 권영이 손으로 제 뺨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걸어왔다. "아따, 경주 형이 먼 일이다요?" 그제서야 권영이 잠이 깼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짜식, 오랜만이다. 잠을 통 못 자부렀냐? 공부는 안 허고 그렇게 잠만 자고 있응께." "아녀라. 괜히 나른해지니까 빌빌거리는 거지라. 그란디 머땜시 왔당가요?" "우리 건주 어디 잠깐 나갔나 본디 한 번 찾아보거라." "아까, 집으로 가는 것 같았는디." "무슨 말이여? 도서관 앞에서 건주 만나려고 쭉 지켜 서 있었는디......." "아니랑께라. 피곤하다고 갔단께 그라요. 한 20분은 넘어 부렀지라." "그럼, 내가 놓쳤단 말이여? 집으로 갈라믄 정문 쪽으로 나와야 하지 않겄냐?" "맞제라. 지도 잘 모르것구만요. 그란디 워째 건주를 그리 급하게 찾아싸요?" "아녀, 니는 몰라도 되닝께 공부 더 혀다 이따 와야 쓰겄다." "형도 참 싱거부요. 그란디 요새 건주, 집에 먼 일 있다요?" "왜 학교에서 먼 일 있었다냐?" "통 얼굴 기색도 안 좋고, 많이 조용해졌어라. 옛날맨키로는 영 아녀라. 공부도 힘들어하 고, 며칠 전에는 담임 선생님께 야단도 맞았어라. 성적이야 걱정하지 않았는디 저번 시험에 서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졌어라. 내신 성적이 많이 떨어졌을 거라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니던디." "그랬냐? 다른 일 또 있는 건 아니제?" "자식이 멀 툭 터놓고 얘기해야 말이 오가제라. 그것도 아닝께 말이어라." "권영아, 워쨌든 고맙구먼. 내가 당체 알지 못했던 것이 많아 부렀네. 집에선 별다른 일이 없는디 건주가 요즘 형한테 예전 같지 않어서 걱정했는디. 그래도 권영이 니가 제일 친한 놈잉께 옆에서 조금씩 신경 써 줘야겄다. 형이라고 있는 게 쪼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 답 답허제. 간다, 열심히 혀라." 쓸쓸하게 웃으면서 무거운 책가방을 손에 들고 뒤돌아 서는 경주의 모습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경주를 보고 백구가 있는 힘을 다해 뛰어 들었다. 백구의 순한 눈동자 를 보자 경주도 절로 힘이 났다. "이 놈 좀 봐라.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서 이제 안아 주지도 못하겄다." 백구가 경주 품에서 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니가 먼 일이다냐?" 어머니가 행주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냥 건주 보고 싶어 왔어라." "건주는 갑자기 왜 그라는디? 건주가 올 시간이 지났는디도 아직 안 왔는디. 갸가 요즘 먼 고민이 있는 것 같은디 아주 답답해 주겄다. 도서관에 안 있겄냐?" "예, 그러겄제라. 건주 오면 저 좀 불러 주시면 좋겠어라." 경주가 모른 척 대답해 버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건주는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인 사도 하지 않고 신발을 벗은 후 마루로 들어섰다. "야아, 언제 들어왔냐? 지금 온거다냐?" 어머니가 건주를 보고 한 마디했다. "예, 저들어갈라요. 피곤혀서 그라요." "느그 큰형이 아까부터 찾던디 형하고 먼 일 있었다냐?" 건주는 못 들은 척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쟈가? 피죽도 못 먹고 댕기는 애처럼 왜 그런다냐." 경주가 건주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하고 있던 시험 준비를 멈추고 방에서 나와 건주와 희 주가 함께 쓰는 방으로 갔다. 방에는 그 새 불이 꺼져 있었다. "자나? 형 들어간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주는 숨을 고르게 쉬며 자고 있었고, 한쪽 옆으로는 건주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건주야, 안 자면 형이랑 마실 좀 나갔다 오자." "......." 건주는 못 들은 척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한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더 이상 깨 우지 않고 경주가 한숨을 두어 번 내쉬었다. 그러고는 건주와 희주가 덮고 있는 이불을 제 대로 펴서 덮어 주었다. 경주는 불도 켜져 있지 않은 방에서 멍하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있었을 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저려 왔다. 경주는 컴컴한 방의 모서리를 더듬거리며 겨 우 일어나 건주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켰다. 그러고는 흰종이와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내 아우 건주 보거라 건주야, 형이다. 오늘 너희 학교 도서관 앞에서 장장 2시간을 기다렸다가 허탕만 쳤다. 겉으로는 웃지만 이 형도 속이 검게 탈 때가 많다. 하지만 무슨 내색을 해도 기분만 더 상하고 좋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더구나. 지금 네가 처해 있는 어둠이 얼마나 길고 짙은지는 잘 모르겠다. 더군다 나 옆에 있으면서도 네 속을 알아채지도 못한 못난 형의 입장이 더 안타깝기만 하구나. 건주야, 뭐든 열어 보아라. 너 자신이 더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말이다. 지금의 네 모습보다 전처럼 너의 구김 없는 모습을 가족 모두는 더 사랑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형에게 얘기해 주면 좋겠다. 작지만 이 형이 너에 게 작은 힘이라도 줄 수 있게 말이다. 형은 항상 네 편이다. 네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요즘 유난히 눈에 밟히고 걸린다. 그렇게 헤매는 널 보니 속상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경주야, 형은 너에게 항상 도움이 되고 싶단다. 이 형은 네가 고민이 있을 때 너의 친구들 처럼 상담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항상 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상의해 주었으면 한다. 요즘 너의 고민을 들어보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내려왔는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더 마음만 무거워진 채로 올라가야 할 것 같구나. 아무 때나 좋으니까 언제든 형에게 오거라.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 형 경주 경주는 편지를 접어 건주의 책상 우에 놓고 방을 나왔다. 잠시 후, 건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주가 쓴 편지를 읽었다. 자신이 뒷걸음질친 것이 형에 게 상처가 되어 깊이 박힐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형이 써 놓은 글을 하나도 놓치지 않 고 읽은 건주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그 일 이후 건주와 경주 사이에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지고 건주는 서서히 예전 모습을 되찾아 갔다. 건주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던 경주는 다시 논두렁에서 일어서며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 다보았다. 논에 있는 줄 알았던 승주가 보이지 않았다. "그라고본께, 막내가 안 보이는디 승주 어디 갔당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작로 저 편에서 승주가 막걸리를 받아 오는지 양은 주전자 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씩씩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경주가 달려가서 주전자를 받아 들자 승주는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으로 경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승주는 오빠 보고 인사도 안 허냐?" 여름에 왔을 때보다 좀더 수줍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승주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워메, 큰오빠 언제 왔단가?" "지금 왔어야. 우리 승주 보고 싶어 왔는디 승주가 안 보여 걱정혔제." 읍내의 초등 학교에서도 옷 잘 입기로 소문난 승주는 빨강과 노랑물방울 무늬가 있는 흰 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피, 큰오빠 거짓말도 헐 줄 아네. 판사들은 정직혀야 된다고 하던디." 경주는 깍쟁이 같은 승주의 반질반질한 검은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야, 정말이라니깐. 큰오빠 말 안 믿으면 이담부터 승주보러 안 와 분다이." 경주는 이런 말을 하면 승주가 겁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승주의 커지는 눈을 보기 위해 한 번 해 본 말이었다. 아홉 살씩이나 나이 차가 나는 오누이지만 5남매 중에서 둘 사이가 가장 절친했다. 주전자를 받아 든 경주는 승주의 손을 꼭 쥐고 흙먼지가 이는 신작로를 걸어갔다. j만치 논둑에서 빨리 오라고 어머니가 손짓을 하셨다. 주전자를 논둑에 내려놓자 어머니는 서둘러 서 돗자리에 빈 잔을 늘어놓았다. "경주는 승주한테 머 할말이 많어서 그렇커롬 도란도란 주고받는다냐? 경주는 살며시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했다. "거 형님 아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어 부렀소. 인자는 컸다고 농번기에 내려와서 이라고 손도 거들고 참말로 다 키워 부렀어라." 머리 가득히 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남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너스레를 떨었다. 탈곡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밀레의 만종에서 풍기는 그런 경건함은 아니었지만, 순박한 인 심이 묻어 나는 저녁이었다. 고작 1미터도 안 되는 담들로 이어진 시골집의 넉넉한 인심은 마치 주홍빛 석양처럼 온 세상을 감싸 안을 듯 넓디넓은 것이었다. 40킬로그램씩 담은 나락 포대들을 집 창고로 옮기 고 나서야 추수 작업은 끝났다. 이틀에 걸쳐 간척지 논까지 탈곡을 끝내자. 경주네 올 가을걷이는 마무리되었다. 탈곡이 끝난 나락들을 앞마당과 뒷마당그리고 길가에까지 펼쳐 널어서 말리는 작업만이 남았다. 승주는 참새 쫓는 일을 도맡아 했다. 옆에서 백구도 한몫 거들긴 했지만, 백구에겐 참새들 이 제 동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지 새를 쫓는 모양새라기보다 장난을 건다는 표현이 더 어 울렸다. 경주는 널어놓은 나락들을 한 번 씩 발로 휘저어 주었고, 가끔씩 마당으로 날아든 참새들 을 쫓기도 했다. 때때로 시간이 되면 운림산방 옆의 예술관으로 가 서화들을 구경하며 남종 화의 혼을 익히고 돌아오기도 했다. 점심때가 지나고 한산해진 오후, 경주는 책을 꺼내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읽기 시작했 다. 교양이나 쌓을 양으로 고전들을 읽었는데, 언젠가 야학의 한 선생님이 경주에게 권해 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란 책이었다. 꽤 두툼한 책이긴 했지만 미국에서 수학을 했다는 저 자가 동양 철학을 서양인들이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중국 철학 개론서나 다름없는 책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손이 가는 책이었다. 두어 시간 동안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책을 들여 다보던 경주는 잠시 눈을 들어 처마 끝으로 드러난 가을 하늘을 보았다. 끝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었다. 그것이 바다나 호수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 다. 경주가 책 읽기에 푹 빠져 있을 때 안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 다. "여보세요. 상원리입니다." "네, 거기 이경주 학생 집 맞습니까, 저는 경주 학교 선밴데 혹시 경주 집에 있을까요?" "제가 경준데 누구십니까?" "어, 경주냐? 나 김 조교야." "네, 김 선배님이 시골집까지 전화를 다 하시고 어쩐 일이세요?" 경주는 궁금하다는 듯이 김 조교에게 물었다. "음,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우리 과에서 나주 금천으로 법률상담을 나가게 됐는데, 거기서 보조로 일 봐 줄 학생이 모자라거든. 네가 지금 그 근처에 있으니까, 도와 줄 수 없나 해서. 어때 괜찮겠어?" "뭐, 집에서 추수가 끝났으니 별 문제는 없는데 제가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게. 모레 오후부터 상담 시작하니까, 나주 금천 초등 학교로 오전11 시까지 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김 조교는 경주의 고교 선배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많 이 주는 선배라 이런 부탁은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진도에서 나주까지는 버스로도 1시간 30 분 정도는 족히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네, 모레 그 곳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경주는 다시 마루로 나가 책을 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틀 후 경주는 백구를 데리고 나주 금천으로 향했다. 10시 30분경에 그 곳에 닿은 경주는 지도 교수와 대학원생 및 4학년 선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 선배들이 경주의 모습을 보고 대견하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일행은 주민들이 준비해 온 식사를 같이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시부터 상담 업무에 들어갔다. 휴식 시간을 이용해서 경주는 백구를 데리고 학교를 산책했다. 학교는 초등 학교 교정답 게 아담한 맛이 있었다. 백구는 낯선 곳에 와서 그런지 집에서 보다 훨씬 더 나댔다. 팬지가 심어져 있는 꽃밭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국화 모종을 위해 학교 뒤뜰에 마련해 놓은 온실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휘젓다가 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경주는 주위를 둘러보며 백구를 붙 잡았지만 날다람쥐같이 이리저리로 뛰어 다니는 바람에 옷이 땀으로 다 젖어 버렸다. 법률 상담이 개인 민원도 아니고 집단 미원이다 보니, 법률 상담 형식이 거의토론과 비슷 하게 전개되었다. 요즘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아파트 붐이 일고 있었다. 주변의 배 밭을 사들여 아파트를 세우려는 업자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배 농사를 짓는 농민들 간 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농민들은 결코 그 넓은 배밭에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물론이 거니와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생업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나주의 어느 곳보다 교통이 좋은 금천은 토질이 배 농사를 짓기에 알맞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배 재배지였다. 그런데 건설 회사측에서는 인근의 밭들을 사들이고 근처 농가를 사들 여서 결국은 배밭들을 에워싸고 말았다. 그래서 섬처럼 남아 버린 배밭 주인들은 하는 수 없이 땅을 내놓으려 했지만, 건설회사측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던 것이다. 지난 1 년 동안 건설 회사측과 자잘한 몸싸움부터 항의 소동까지 있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법률 상담을 나온 오늘도 농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2킬로미터를 두고 전경 1개 소대가 진 을 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몇몇의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무장한 전경 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보조 요원인 경주가 해야 할 일은 보조 자료집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물어 오는 간단한 법률 상담문서들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학교 교무실에 놓아두었던 자료집을 가지고 나서던 경주는 백구가 교무실 안으로 달음질 치지 놀란 나머지, 자료집을 바로 창문 쪽에 놓고는 교무실로 달려가 백구를 잡아 왔다. 어미를 닮아 팔각형 얼굴에 벌써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왼쪽으로 비뚤어져 단정하게 말려 있었다. 백구의 어미는 2년 전 진도견 챔피언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명견이었다. 다행스 럽게 같은 해 챔피언이었던 황구와 교미하여 새끼 잘 낳기로 유명한 진돗개였다. 이번에 데 리고 온 강아지도 그 어미 백구가 낳은 여섯 마리 중 한 마리였다. "이 녀석을 괜히 데려왔군. 이 녀석아 얌전히 좀 있어라." 경주는 백구를 하 번 쥐어박았다. 영리한 놈이라서 그런지 주인이 화난 것을 알고는 꼬리를 내린 채 얌전히 계단에 앉아 있 었다. 그런 백구가 갑자기 안쓰러워진 경주는 한 번 쓰다듬고 창턱으로 가 자료집을 집으려 고 할 때 돌개바람이 운동장 저 편에서 불어 왔다. 그 탓에 경주가 집기도 전에 창턱에 놓 여 있던 얄팍한 자료집들이 운동장 한복판으로 날아가 버렸다. 경주는 서둘러 흩어진 자료 집을 주웠지만 자료집은 어느 새 근방 40, 50미터로 흩어져 버렸다.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철봉 근처에서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통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줍는데 문득 조그만 손이 그에게 자료집을 내밀었다. 손을 보는 순간 경주 는 놀랐다.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이기에 더욱 그랬다. 경주는 자료집을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아이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고맙다, 이 동네 사는가 보구나?" 여자아이는 경주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경주 주위를 맴도는 강아지에게 정신이 팔려 경주의 말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백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 는 궁금하다는 듯 경주에게 물었다. "이 강아지 이름이 뭐예요?" "글세, 아직 이름이 없어. 지금 지어 볼까? 여기가 금천이니 까, 금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 니?" "금이, 예쁘네요. 금이야." "너 개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예." 경주는 새까만 긴머리에 쌍커풀이 있는 커다란 눈을 가진 그 여자아이를 보며 막내 승주 를 떠올렸다. "나도 너만한 동생이 있는데, 몇 학년이냐?" "4학년 1반이구요, 이름은 배영은이에요." "우리 승주보다 한 학년 아래구나." 김 선배가 멀리서 경주를 불렀다. 운동장 한켠에 서있는 천막 사이로 '서울대학교 대민원 법률 상담'이라는 활자가 무지개처럼 빛났다. 경주는 자료집을 들고 농민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다. 백구도 경주를 따라 귀를 날리며 달려가고, 그 뒤를 따라 영은도 뛰었다. 이미 상담은 시작되었고 농민들의 목청은 스피커 소리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경주는 얼 핏 들었지만 그것이 수업 시간에 들어 본 '민법상 상린 관계'란 걸 알 수 있었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쓴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는 배나무 가지가 아파트 2층 베란다에 걸렸 는데 그 집주인이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가지째 베어 버렸다고 하소연을 했다. 상담이 끝날 때까지 영은은 백구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오후 6시쯤 상담이 모두 끝나고 간단한 식사를 한 뒤 교수와 학생들이 타고 왔던 관광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백구가 없어 졌다. 경주는 백구를 찾아 한참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저쪽에서 붉은 석양을 등지고 영은이 백구를 안고 오는 것이었다. "금이가 너무 예뻐요."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영은은 강아지를 건넸다. 칠흑보다 더 까만 영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경주는 갑자기 영은에게 강아지를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주는 영은을 보면서 고르게 난 하얀 치아가 약간 드러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금이가 그렇게 예쁘니? 영은이라고 했지? 그러면 영은이한테 금이를 선물로 주고 갈 테 니까 내 대신 잘 키워야 한다." 경주는 영은에게 백구를 키우라고 한 것이 참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은은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탄성을 지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강아지를 받아 안은 영은은 고마 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경주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영은의 얼굴엔 사랑스런 동생과 같은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경주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다시 낙방을 한 영진을 남겨 두고 군에 가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곳이고 더 이상 미루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해서 입대를 결정했다. 신병 교육대에 입소를 할 때만 해도 뽀얗던 얼굴이 어느 새 구릿빛이 되어 있었다. 동부 전선을 사수하는 최일선 초병이 된 기쁨에 그 고된 훈련 과정까지도 해낼 수 있었다. 얼룩무늬 전투복에 소양강 기슭을 비호처럼 뛰어다니며 수색 훈련을 할 때는 팔도 사내들 의 함성도 하나둘씩 거꾸러졌다. 이렇게 지친 몸들이 낙엽처럼 쓰러져 길가에 주저앉아 포 기하려 할 때도 경주는 넘어진 전우를 일으켜 세우며 거친 전선의 산등성이를 향해 자신의 무게보다 더 큰 군장을 포개어 전선의 일등 사수가 되곤 하였다. 다부진 체격에 국방을 지 키는 경주의 모습은 사나이의 책임감을 한 층 더해 주었다. 경주는 신병 훈련을 마치고 퇴소식을 하는 연병장에서 고향하늘을 그려보았다. '그래, 큰 힘이 되어 주는 고향이 나를 지켜보고 있어.' 경주가 훈련소에서 배치 받은 부대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설악산 인근의 사단 본부 였다. 그는 육군 상병에서 차출되어 대한 민국에서 가장 훈련이 고되다는 하사관 교육을 마 치고 돌아와 위병조장을 맡았다. 위병소에서 바라보는 설악산의 봄은 황홀 그 자체였다. 풋풋하게 연록의 물이 올라 온통 연둣빛으로 감싸인 산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서해의 최남단에서, 동부 전선의 최일선 전방 강원도에서 경주는 사나이의 기개를 펴는 군 생활을 경험했다. 목진지 알프스 스키장에서 미시령까지, 전선의 설악은 사계가 젊음 그 자체였다. 더구나 오색 약수터를 가로질러 한여름 낮에도 발이 시려운 백담 계곡의 신선수 는 그의 젊음을 한컷 상큼하게 해주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더니 경 주도 군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돌아서는 경주에게 중대장이 한 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경주, 꼭 법조인이 될 수 있지!" 경주는 중대장의 말에 경례를 하며 중대원들의 목마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전보다 어른 스러워진 자신을 느끼면서 그는 군 생활을 마감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 시 간들이 그에게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제대병 지프에 올라 스크랩된 추억들을 하나둘씩 생각하다 경주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입대하는 날 일부러 목포역까지 나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건네던 영진과 미자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군대를 제대한 경주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가 군에 있는 동안 영진은 삼수를 하고 고대 신방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영진은 신체 검사에서 척추 디스크로 군면제를 받았다. 한참 혈기로 젊음을 불태워야 할 시기에 빽빽한 학원 강의실에서 참고서들에 파묻혀 지내다 디스크까지 얻은 영진의 얘기를 듣고 경주는 가 슴이 아팠다. 서울에서 영진과 함께 반 년 동안 복학 준비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한 경주는 본격적인 사법 시험 준비에 열을 올렸다. 버드나무에 물이 막 오를 즈음 법대 정독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경주를 미자가 찾아왔 다. 둘은 법대 우측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자를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건물 현관 쪽으로 갔다. "인사해, 진우 씨. 내가 말했던 이경주야."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무엇보다 인상에 남았던 건 건강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진우라고 합니다." 진우는 중위 계급을 단 군인이었다. 어안이벙벙해진 경주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연신 미자 를 쳐다보았다. "우리 이번 가을에 결혼할 거야. 전에 내가 설악산으로 졸업여행 갔을 적에 살짝 빠져 나 와 너 면회 간 적 있었잖아. 그 때 버스에서 만난 사람이야. 사실 너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 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주고 싶었어. 물론 어릴 적부터 친구이 기도 하지만." 경주는 미자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이해 인연이 맺어졌다 며 고마워하는 미자를 보니 경주는 더 뿌듯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제대한 우영도 복학을 했다. 영진은 같은 서울에 있긴 했지만 서로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할 형편이라 경주는 우영 생각이 더욱 간절했었다. 그렇게 그리던 친 구가 복학을 하자 경주는 학교 생활에서 더욱 의지가 되었다. 우영도 본격적으로 언론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서로가 힘이 되어 주면서 그렇게 그 해 가을을 보냈다. 이듬해 오월, 문득 우영이 교생 실습을 나간다고 했다. 경주는 우영이 언제 교직을 이수했 는지 궁금했다. "너도 야학 선생님을 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그냥 이수했는데, 심신 수양도 할 겸해서 지방으로 가게 됐다. 아직 학교 결정은 못 했지만 나중에 연락할게." "한 달은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보고 싶어서 어쩌냐?" 경주의 말에 낯간지럽다는 듯이 우영이 손을 들어 경주의 가슴을 살짝 쳤다. "야, 누가 들으면 비웃겠다." 교생 실습을 나갔던 우영이 마지막 주 경주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경주에게 5월이 아쉽게 날개를 접고 있다. 그 물보라처럼 피어오르던 햇살들도 이젠제법 강하게 내 리쬐기 시작했어. 여기 나주에 내려와 있으면서 네 생각 많이 나더라. 내가 교생으로 배정된 학교는 전남 나주 금천이야, 이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우리가 고등 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너희 집에 내려가서 지냈던 일이 생각나더구나. 그 날 밤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의 긴 무리들과 기묘하게 얽힌 성좌들, 기막힌 쌍계사의 포근한 절경과 아름다운 운림산방의 전경, 그리고 짜릿했던 수박 서리, 모든 것이 그립다. 누구나가 한 번쯤 동경하는 것을 나는 네 덕에 한꺼번에 접했다는 것을 이 곳에 와서야 깨 달았다. 이 곳으로 교생 실습을 온 것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아이들을 대하면 뭐랄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순박하고 순진한 면이 느껴지기도 해. 그것은 내가 10여 년 전 너에게서 처음 보았던 것이기도 하지. 하여튼 여기서의 생활은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었어. 이 기쁨 혼자만 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너를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공부한답시고 거절 하지 말고 이번 주말쯤 내려왔으면 좋겠다. 너하고 실컷 취해 보고 싶다. 기다리고 있으마. 올 때는 학교로 먼저 연락하고 와라. 그럼 이만 줄인다. 친구 우영 오후 4시쯤 나주 금천 고등 학교에 도착한 경주는 교문을 들어섰다. 그 때 교문 바로 아 래 길가에서 황구와 백구가 서로 장난질을 하면서 빙빙 돌며 뛰놀고 있었다. 진돗개를 무척 닮았지만 진돗개치곤 꼬리가 너무 길고 쳐져 있었다. 경주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휘파람으로 개들을 불러 보았다. 의외로 사람을 잘 따랐다. 자신의 발치로 달려온 개들은 한 번씩 쓰다듬고는 경주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수업 중이던 우영은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오는 경주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수업을 마쳤 다. 우영은 양복저고리를 손에 쥔 채로 단숨에 운동장으로 달려나왔다. 곱게 접힌 하얀 칼라의 여고생들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포옹하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교실 쪽을 보며 우영이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해 보였 다. 아이들은 마지못해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창가엔 아이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영은 경주와 함께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근처 술집으로 가려고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우영이 경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환호하듯 목청을 돋구었다. "이경주, 와 줘서 고맙다." 경주는 우영을 바라보며 코라도 비틀 참으로 손을 우영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런데 좀 전 에 교문 밖에서 놀고 있던 두 마리의 개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쏜살같이 뛰어갔다. 두 사람은 놀라 개들이 달려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들은 한 여학생의 주위를 맴돌면서 앞발을 들어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천 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영은이네 개들이구만. 저녁이면 언제나 저 두 마리가 마중을 나오더라구. 백구야, 이리 와. 이상하게 이 개들은 나랑 정이 많이 들었나 봐. 개들이라고 무시는 못 하겠더라구. 주인 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그런 것 보면 참 대단해." 우영이 개 주인을 아는지 그쪽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경주는 슬쩍 소녀의 얼굴을 보았 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소녀가 경주와 우영의 옆을 지나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녀의 목과 하얀 교복 칼라 사이로 단발머 리가 찰랑거렸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소녀는 수줍게 인사를 하고 경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앞서 나갔다. 두 마리 의 개들이 소녀를 따라가다 말고 경주와 우영 사이에서 맴돌자 소녀가 뒤돌아 서서 개들을 불렀다. 소녀가 뒤돌아 섰을 때, 경주에게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이미 경주의 머릿 속은 백구와 단발머리 소녀가 뒤엉켜 있었다. 법률 상담할 때 만났던 쌍커풀이 진 눈이 큰 아이였다. 금방이라도 말을 할 듯이 드러난 하얀 고른 치아가 더욱 그랬다. 이제 제법 여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달라진 것이라곤 훌쩍 커 버린 키와 안경을 썼다는 것뿐이었다. 경주는 온몸이 짜릿한 전율로 휩싸이며 빨라 지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그 어린 소녀가 분명했다. 우영이 경주의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왜, 아는 아이야?" "응, 그런 것까진 아니고 어쨌든 네가 잠깐 불러 봐." "싱겁긴, 알았어. 영은아!" 우영이가 저만치 앞서 가는 소녀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저요?" 우영이가 와 보라는 시늉을 하자 소녀는 그들 곁으로 다가와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 았다. 경주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너 예전에 여기 초등 학교로 법률 상담 왔던 사람들 혹시 기억하니?" 경주는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단발머리를 한 번 쓸어 내 렸다. "예, 제가 초등 학교 다닐 때 한 번 왔었던 것 같아요." 소녀도 경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경주는 소녀가 기억의 끈을 놓지 않도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때 강아지 준 사람도 기억나니?" 소녀는 그제서야 경주를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그럼, 아저씨가 그 때 그분이세요?" 소녀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우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두 사람,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었어?" 우영은 경주와 영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손뼉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말을 들은 영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영은은 수줍은지 재빨리 인사를 건네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영은은 가슴이 뛰는 것을 이기지 못한 채 개들보다 더 빨리 교문을 빠져나갔다. "저 녀석들이 그 때 내가 주고 간 백구의 후예들이란 말이지. 참 세월 빠르다. 그 때 저 애가 초등 학교 4학년이었는데 벌써 고등 학생이라니......." 그 날 저녁 경주와 우영은 근처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해서 우영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도 우영의 주량은 셌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배는 더 마셨다. 일찌감치 술 때문에 곯아떨어진 우영의 곁에 누운 경주는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 영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 거렸다. 자신보다 족히 열 살은 아래로 보이기 s했지만 뭔가에 사로잡힌 듯한 이 기분을 경주 역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경주는 창문 새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면서 다시 방을 나섰다. 다행히 대문은 열려 있었다. 경주는 하숙집 아래에 있는 배밭 주위를 걸으면서 상큼하게 풍겨 오는 배나무의 냄새를 맡 으며 한참을 생각했다. 결국 경주는 우영이 일어나거든 얘기해 보기로 하고 다시 방으로 들 어왔다. 언제 깼는지 우영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그냥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왔어." 바로 영은의 얘기를 꺼낼 수가 없어서 경주는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후 우영 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야,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경주는 한참을 뜸을 들이며 우영을 쳐다보았다. 우영은 무척이나 궁금한 어굴로 경주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영아,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줘라. 아침에 내가 쪽지 줄 테니까, 그걸 영은이한테 좀 전 해 줘." 우영은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경주에게 되물었다. "영은이에게 그렇게 하는 네 의도를 먼저 알아야겠다. 이상하잖아." "그냥 다른 건 묻지 말고, 이번만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뭐 특별히 말할 것도 없지만......." "네가 그렇게 꼬리를 빼니까 더 궁금하잖냐." "그것 참. 이왕 해 줄 거면 곱게 좀 해 줘라." "알았어. 그럼 내가 내일 출근할 때 잊지 말고 챙겨 줘." 그렇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경주는 영은에 대한 미묘한 감정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 었다. 다음 날 경주는 마음을 바꿔 자신이 직접 영은을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이라 학생들은 정 오가 지나자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하나둘씩 무리지어 교문을 나섰다. 경주는 영은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수고로움 없이 영은을 찾아 낼 방법이 문득 경주의 머리에 떠올랐다. 언제나 영은의 하교시간이면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개들을 찾으면 될 것이다. 역시 백 구와 황구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운동장 구석에 와 있었다. 저희들끼리 장난질을 하던 개 들이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면서 교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까 영은이 교문을 막 나 서고 있었다. 경주는 급하게 길을 건너서 영은에게 다가갔다. 걸어오는 경주를 보고 영은이 고개를 숙 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박 선생님 친구분이시죠?" "기억하고 있구나?" "그럼요. 강아지를 주셨던 분인데......." "수업이 이제야 끝났나 보구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은은 경주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백구를 영은이가 잘 키워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제가 좋아서 한 일인 걸요." 경주는 주머니에서 주먹만한 조그만 상자를 꺼내 영은에게 건넸다. 당황한 영은은 경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별거 아니야. 집에 가서 보면 안 도겠니?" 영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로부터 멀어진 영은은 학교 앞 골목으로 꺾은 다음 경주가 준 상자를 열어 보았다. 골판지로 만든 상자 안에는 어린 여자 아이 모양을 한 잘 다듬어진 목각 인형이 들어 있었 다. 인형 뒤에 '경주'라고 새겨져 있었다. 영은은 주위를 맴돌며 걸음을 재촉하는 개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얼핏 보았던 경주의 얼굴을 애써 떠올리며 영은은 무언가 가슴을 파고드는 간절함 같은 것을 느꼈다. 영은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잘 띄는 곳에 목각 인형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뭔가 행운 을 가져다주는 애장품으로 그것을 잘 간직하고 싶었다. 영은은 자기도 모르게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경주가 나타나길 바라며 교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 후로 경주를 만날 수가 없었다. 하교길에도 영은은 쉬 교문을 나서지 못하고 황혼이 다 저물어 사방을 어둠이 감쌀 때쯤 이 되어서야 개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징검다리 서서히 더위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벽파진 앞 바다의 푸른 물결 위의 갈매기 떼들도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날개에 물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온 승주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김 비 서가 시원한 음료수를 내왔다. "고마워 김 비서, 이제부터 여름이 시작되려나 봐. 몇 걸음 안 걸었는데도 등줄기가 젖는 걸 보면 올해는 작년보다 더위도 빨리 오고 굉장히 더울 것 같지 않아?" "엘니뇨 때문이라잖아요. 이상 고온으로 손해본 농가들이 하나둘이 아니래요. 더울 땐 덥 고 추울 땐 추워야 하는데 기온이 자꾸 올라가기만 하고......, 도무지 예전의 철 따라 다르던 것들도 이젠 여름 아니면 겨울로 굳어질 것 같다니까요." "정말 날씨 때문에 여러 가지로 피해가 크다더군." 승주는 브라인드 사이로 내다보이는 밖을 바라다보았다. "김 비서네 과수원 한다고 했었지? 올해는 작황이 좀 어떨 것 같아?" "과수들이야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따뜻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작년이나 비슷하게 거 둬들일 것 같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되뇌었다. '기온이 높아져서 큰 일이여. 모내야 할 때는 모가 보타불고 또 한참 자랄 때는 이상 저온 인가 먼가 하는 것이 설쳐대니 어디다 발을 두고 지켜봐야 할지 답답하단께. 우리 겉은 농 군들이 질로 치는 것이 벼농산디 그라고 기온이 미친 드끼 오락가락하믄 으짜란 것인지 몰 러.' 아버지의 근심을 말하듯 깊게 패어 가는 이마의 주름살은 해마다 수를 더해 갔다. 사실 구기자를 수확하는 시기가 가을이고 보니 너무 늦게까지 더위가 지속되는 것, 너무 일찍 추위가 시작되는 것 모두 재배에 있어 불리한 기후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적절한 건기 가 되어야만 최고 상품의 구기자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김 비서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승주는 고개를 들었지만 언제 나 갔는지 김 비서는 없었다. 승주는 요즘 들어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 게 되었다. 그녀는 회사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지금처럼 정 신을 딴 곳에 파기가 일쑤였다. 그녀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스듬히 쳐진 블라인드를 걷었다. 마당엔 오전의 활동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승주는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켰다. 그 때 인터폰이 울렸고 갑작스런 인터폰 소리에 놀랐는지 이내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사장님, 에드컴의 김현호 이사님 전화입니다." 승주는 버튼을 눌러 스피커폰으로 고정시켰다. "돌려 줘요." "예, 알겠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김현호입니다. 어제부로 1차 촬영 작업이 끝났습니다. 필름을 가지고 내려갈까 하는데 어떠실지." "저희 쪽에서 올라가야죠. 수정 사항이 있으면 여기보단 서울이 훨씬 편리하잖아요. 제가 내일 오전 중으로 다시 한 번 김 이사님께 연락을 드릴게요." "진도에 가 보려고 서형섭 차장과 벼르고 있었는데 발도 못 붙이게 하시네요. 이번만 양 보하시죠." "그랬어요?" 현호가 수화기를 타고 옆에 온 느낌이었다. 승주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지난번 회사 방문 이 결렬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저도 모르게 현호를 기다려 왔던 모양이었다. 잠시 감상에 젖은 승주의 눈이 수정처럼 또렷하게 반짝였다. "이번엔 저희가 움직이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엔 바다 농산물에서 귀한 분이 오실 것 아닙 니까?" "김 이사님, 고집도 만만치 않으시네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번엔 제가 졌습니다." "이거 참,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오시면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 큰일인데요." "시원한 구기자 음료나 한 잔 주시면 됩니다." "그런 거라면야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초행길이니 조심해서 오시구 요, 도착하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승주는 인터폰을 누르고 김 비서를 찾았다. "네, 사장님." "장 상무님 오시라고 하세요."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5분쯤 지나자 장 상무가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장 상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승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세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주는 장 상무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한 다음 그녀도 소파에 앉았다. "방금 CF 작업이 마무리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내일 1차 시사회가 있는데 에드컴 측에서 여기로 온답니다." "벌써 진행이 다 됐군요. 특별한 지시 사항 있으시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오후에 있을 기획 회의에 간부들 전부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사회 준비와 공 장 시찰 준비도 해 놓으시구요." "예, 잘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 목포 대리점엘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일은 착오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장 상무는 들어온 지 10여 분 만에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노익장임에도 결코 꺾일 줄 모르는 그의 의욕에는 능력 있는 젊은 사원들조차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회사가 이렇게 급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 상무의 역할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승주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장 상무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다음 날 오전, 직원 조회는 8시로 앞당겨 진행되었다. 평소처럼 각자 전날의 물품 생산량 과 당일의 생산 기획량을 보고했고 간단히 출납계 현황을 설명하면서 조회는 마무리되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저보다는 장 상무님이 더 피곤하실 텐데요. 조회에 참석하시려고 집에서 7시에는 출발하 셨겠어요. 그나저나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죠?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요." 승주가 회사 로비에서부터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그보다 먼저 오늘 광고 시사회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서요." 승주가 회사 로비에서부터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그보다 먼저 오늘 광고 시사회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언제쯤 도착한다고 미 리 연락은 왔습니까?" "아까 김 이사님이 일찍 전화 주셨어요. 진도에 5시 도착 예정이라고 하니까 오늘은 그 시간에 맞춰 들어오셔야 해요." "걱정 마십시오, 시간은 넉넉합니다. 우선 진도 향토 회관에 도착해서 시음회를 하고 여론 조사가 있는데 10시 이전에 끝날 겁니다. 참,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여성지 인터뷰 있는 것 아 시죠? 사회부 오희은 기자가 3시경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김 비서한테 들었습니다. 오늘은 정신없이 바쁠 것 같으니까 힘드시겠지만 장 상무 님께서 신경 좀 써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장 상무는 김 과장을 불러 그 날의 지시를 내리고는 곧장 승주와 함께 현관으로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는 승주와 장 상무의 모습이 보이자 승진은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차 뒤쪽 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 따라나온 김 과장은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지 장 상무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질문을 했다. 옆에서 기다리던 승주가 먼저 차에 올랐다. 잠시 후 얘기를 다 마쳤는지 장 상무가 차에 올라타면서 문을 세게 닫았다. 차쪽으로 목례를 해 보이는 직원들을 향해 장 상무는 가벼우 누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승주는 좀 전에 장 상무와 김 과장이 꽤 오랫동안 나누었던 얘기가 궁금했다. 장 상무는 업무상의 일이라면 티끌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승주에게 보고했다. 승주는 잠시 김현호를 떠올렸다. 얼마 있으면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 근거렸다. 김현호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던 승주는 장 상무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반응 이 없는 승주를 장 상무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반응이 없는 승주를 쳐다보며 zjk란 목 소리로 장 상무가 말했다. "사장님, 지금 제가 한 말 들으셨죠?" "예? 무슨 말씀하셨어요?" 장 상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 다시 차근차근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좀 전에 김 과장하고 얘기한 건데요, 이번에 중앙음료 회사에서 들어온 제휴 건 말 입니다. 사장님께서 그냥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직원들 중에 상당수가 그것에 이의 를 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재고하는 게 어떨까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 다." 승주는 자신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양눈썹 사이로 가져가 지그시 눌렀다. 눈에서 손을 뗀 승주는 다시 목언저리를 매만지면서 뭔가를 얘기할 듯 입을 달싹거렸다. 하 지만 그것은 소리로 나오지 못하고 대신 짧은 한숨으로 힘없이 내려앉아 버렸다. 다시 승주 는 입가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쪽의 제안이 물론 좋은 조건이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지역 발전과 이 고장을 위한 기 업을 만들고자 이제껏 6년이란 세월을 여기에 투자했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원하는 건 단지 우리의 식품 특허를 함께 사용하자는 것뿐이에요. 물론 그러면 우리 회사에 재정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고장의 구기자 재배 농가엔 큰 타격을 줄 거예요. 지금 한 약상에만 나가도 값싼 구기자가 얼마든지 있는데, 비싼 값 주고 누가 여기 구기자를 사 먹 겠어요. 대기업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대량 생산과 수지 타산을 목적으로 하는 대기업에서 저희회사와 손을 잡았을 경우 저희구기자만 고집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건 당연한 겁니다. 매사 일을 신중히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저라고 긍정적인 부분을 검토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저희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 렇게 터무니없는 계산으로만 일을 진행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번 제휴 건은 장기적으로 보면 이 고장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에도 별로 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저 는 그 일만은 뜻을 굽힐 수가 없습니다." 장 상무는 승주의 논리 정연한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까지 보아 온 승주에게서 이토록 정황 판단이 거시적이고 논리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평소에도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던 단호한 생각들이었기에 그렇게 막힘없이 술술 얘기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 다. 언제나 승주는 마음속에 고향과 지역 가치 발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경주에게서 받은 영향이기도 했지만, 승주 역시 회사를 혼자 이끌어 오면서 가장 주 력한 것이기도 했다. 즉, 그녀는 자신의 회사가 지역 속에서 성장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 는 것을 기업 이념으로 삼고 있던 터였다. 지역 사회와 공생하는 기업만이 진정한 농민의 기업이자 지역의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벌렸던 입을 좀체 다물지 못하던 장 상무는 승주의 이야기가 끝나자 승주의 언변과 기업 정신을 치하하기에 바빴다. "사장님은 요새 젊은이들 같지 않습니다. 참 시각이 넓고 깊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 면 대단한 현실성과 경제적인 감각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사장님과 있을 때마다 매번 느끼 는 거지만 사장님은 그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저도 열심히 분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 말만 앞세우다가는 사장님 앞에서 코 한 번 크게 납작해질 날이 있을 것 같네요." 장 상무는 그 특유의 팔동작을 해 가면서 얘기를 끝맺었다. 어느 새 차는 윤기를 뽐내며 진도 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승주는 창문을 통해 멀어져 가 는 대교를 바라보면서 들릴 듯 말듯하게 가는 숨을 내쉬었다. 계속 쉬지 않고 말을 해서인 지 조금은 숨이 찼다. 승주 일행은 시음회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방향을 돌렸다. 승진이 라디오 채널을 바꿔 가 면서 들을 만한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다. 한참을 지지직 소리를 내던 라디오에서 귀익은 목 소리가 들려 왔다. 김창환이었다. 머리숱이 적은 중년의 털털한 사내. 승주나 승진 세대라면 누구나가 좋아하는 가수였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기까 지 했다. 매일 11시부터 12시까지 김창환은 올드 팝송과 아름다운 사연들을 전해 주는 라디 오 속의 집배원이었다. 승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소리에 젖어들 채비를 했다. 그녀는 약간 세워 앉았던 몸을 의자 깊숙이 뉘인 다음 살짝 눈을 감았다. 맨해튼의 '키스 앤 세이 굿바이'에 대한 사 연을 들려 준 그는 그만의 독특한 주춤거림으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느낌만으로도 이마 를 짚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띄엄띄엄 자신의 추억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굵직한 남성의 내래이션이 깔리고 곧 이어 그 굵직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달콤한 남자의 목소리가 멜로디를 타고 흘러 나왔 다. 그리고 간간히 코러스가 삽입되었다. 한참 동안 라디오를 듣던 승주에게 승진이 말을 걸 었다. "참, 이 사람 좋지라?" "으응, 꼭 이웃집 아저씨 같은 구수한 사람이야." 승주가 웃으며 말하자 승진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장 상무는 요며칠 회사 일로 무리했던지 온몸에 힘이 풀린채 자고 있었다. 채널을 바꾼 라디오에선 이 시대의 보기 드문 명콤비 강석과 김혜영이 진행하는 '싱글 벙 글 쇼'가 흘러 나왔다. 승주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승주의 모습을 백미러 로 바라보던 승진이 흥에 겨워서 물었다. "그렇게도 재밌어라?" "그럼. 너, 이 프로가 얼마나 청취율이 높은지 모르는구나?" 승주는 그런 승진의 무덤덤한 반응에 아쉬운 듯 말했다. "아따! 왜 모른다요? 저도 애청자여라." 이제서야 제 짝을 만났다는 투로 승주는 다시 승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최고의 콤비란 말이야. 강가에 돌멩이와 온실 안의 푼수라고 하지." "두 사람 방송 궁합이 대단하긴 대단하지라. 한 부부래도 저렇게는 못할 것이요이." "어쩜 저렇게 유머와 재치가 재빠른지.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프로인 것 같아." "그런께로 이 프로가 장수하는 것이제라." 승진도 두 사람의 진가를 인정한다는 투로 덧붙였다. "어쩌면 이렇게 코미디와 스포츠를 혼합시켜 정치, 경제, 사회를 비교, 분석해서 시민들의 애환을 풀어 주는지 몰라." 승주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다스런 소리에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 에드컴에서 김현호 일행이 진도에 도착했다. 5시에 사무실에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승주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의자에서 일어나 시선을 창 밖으로 고정시켰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김 비서가 들어왔다. 그 뒤로 김현호와 서형섭 차장이 따라 들어왔다.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양이 친형제같이 의좋아 보였다. 승주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새로 바뀐 현호의 머리 스타일이었다. 윤기가 나는 머릿결에 정돈된 앞머리를 짧게 깎은 모양이 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현호는 베이지 색과 밝은 회색이 잘 조화를 이룬 체크 무늬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쯤 은색 넥타이핀이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깨끗하고 정갈한 현호의 모습은 마치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꼼꼼하게 챙겨 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두분,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예, 앉으세요.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무슨.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니까 휴가라도 온 것 같아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자주 와야겠어요." 현호가 사장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오시는 길이 힘들지 않으셨다니." "진도가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인 줄 몰랐어요. 서울 토박이라 서울말고는 다른 지방은 거 의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서 차장님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요." 특별히 마땅한 얘깃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얼굴을 조금 숙인 채로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 다. 서울에서도 몇 번 만났었지만 그는 항시 흰 마블 와이셔츠에 검은 멜빵을 해서인지, 활 동적이면서 밝은 분위기가 그에 대한 느낌이었다. "서 차장님, 오늘따라 굉장히 멋져 보여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약속이라도 있는 것 아니 에요?" 승주가 웬일로 농담을 했다. "이 사장님도 참, 매일 입고 다니는 건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띄우세요?" "아녜요, 오늘 보니까 서 차장님 때문에 사무실이 더 환해진 것 같아서요. 정말인데 왜 안 믿죠?" "하하하, 그럼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승주의 말을 듣고 무안했는지 서 차장이 고개를 숙이고 들고 온 서류 가방을 갑자기 뒤적 거렸다. 승주 역시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내 놓고도 서 차장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난감해져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 사장님, 벌서부터 차별하시기예요?" 이 틈을 놓칠세라 현호가 얘기 중간에 끼여들었다. "예?" 승주는 현호의 말에 이렇다 할 대답을 모하고 얼버무리며 인터폰을 눌렀다. "김 비서, 여기 차 부탁해요." 김 비서는 구기자 음료를 내왔다. 유리컵 밖으로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어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현호와 서 차장은 동시에 컵을 들며 말했다. "서울에서 작업한 일은 마무리가 잘 되셨나요?" "예, 조금 있다 보면서 얘기를 나누죠. 그래도 일이 순조롭게 끝난 편입니다." "저희 고아고 일이 걸려서 주말에도 수지 못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바다 농산물의 구기자 덕분에 저희들이 먹고산다고 보면 돼요. 가끔씩 악에 받쳐 일이고 뭐고 팽개치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일이 많을 때가 좋은 거죠.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이 많아야 마음이 덜 불안합니다." 서 차장은 승주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까지 하세요. 프로 정신을 갖지 않으면 아무나 그렇게 감각 있는 일 을 할 수 있겠어요? 특히 두 분이 하시는 일은 더 그렇구요." "그렇지 않아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장님과 대적할 상대는 아무도 없을 겁니 다. 오늘 여기 와서 보니까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현호가 이쯤해서 말을 잘랐다. "이제 그만 1차로 제작된 CF를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네, 그럼 이제 그만 일어서죠." 김현호가 나갔을 때 밖에는 장 상무와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바다 농산물 임원들과 인사를 하고 나서 CF를 보러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승주는 현호의 조금 뒤쪽에서 따라가며 현호의 그림자를 밟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호는 광고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장 상무에게 CF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었고 승주와 서 차장이 그 뒤에서 이번 광고 의 요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대회의실은 사무실을 나서서 바로 오른쪽 코너에 위치해 있었다. 시사회를 준비한 대회의 실에 도착하니 그 곳에는 미리 준비된 약간의 다과가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고, 서너 명의 진행 요원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회의실로 들어서서 승주와 임원 모두가 착석한 다음 서 차장은 준비해 온 자료를 꺼내 진행 요원에게 넘겨주었다.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직원의 보고가 떨어지자 장 상무가 리모컨을 작동시켰고 대형 화면 에서는 바다 농산물이란 글씨가 한 번 크게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광고가 시작되었다. 화목한 가족을 소재로 진행된 CF였다. 화상이 순식간에 혜성의 꼬리처럼 빛가루들을 뿌 리면서 마지막으로 바다 농산물의 로고가 나왔다 사라지며 광고는 끝이 났다. 광고의 내용이 끝나자 승주 옆에 앉았던 김현호가 제일 먼저 승주를 쳐다보았다. 김현호 는 승주에게서 눈길을 쉽게 떼지 않았고, 그녀에게 광고 평가를 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승주 는 기대는 기대에 못 미치는 다소 불만족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장 상무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승주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김현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틀에 박힌 드라마의 한 장면 같죠?" 김현호는 슬쩍 승주의 심중을 떠보려는 속셈에서도 그랬지만, 승주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 들을 보며 얘기했다. "......." 승주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현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경제가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가족적 이고 구수한 것, 그러니까 따듯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것들을 찾죠. 다소 수다스러움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이 지금 상황에선 사람들에게 보다 강렬하게 어필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 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서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 "우선, 한 분씩 차례대로 자기의 의견을 솔직하게 얘기해 주시면 수렴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대회의실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김현 호의 말도 그럴 듯했지만 승주가 바란 광고 이미지는 활력 있고 패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식품으로 구기자 식품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지역 사회발전과, 무엇 보다 우리 농산물을 수출하여 현시대의 경제 상황극복에 두려고 했었다. 어쩌면 요즘 한참 바쁜 농촌처럼 각자 자리에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리를 지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회사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어 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승주는 장 상무에게 의향을 물었다. "장 상무님은 어떠셨어요?" 장 상무도 승주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한마디했다. "사람들에게 인정이나 사랑을 어필하는 건 좋지만 아무래도 경제 위기를 표현한 것치고는 스토리가 너무 단조롭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광고를 처음 봤을 때 독특한 고 정 멘트나 효과가 기대 되야 하는데 단지 화목한 가정만을 보여 준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시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반 서민들을 외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장 상무는 핵심을 찔러서 얘기했다. 이에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현호가 물었다. "그럼, 생동감 있는 스토리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시죠?"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애써 만든 광고였지만 승주는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승주는 그들이 3주 동안 정성 을 기울인 광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 미안했지만 그녀도 사업가이고 도한 광고주로서 마땅히 내려야 할 처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호 일행에게 너무 냉대하게 잘라 얘기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는 했다. 대회의실을 나올 때는 바다 농산물 사람들이 먼저 문을 나섰고 현호가 마지막으로 회의실 을 나왔다. 좀 전의 상기되었던 현호의 표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어느 정도 승주의 의견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직원들은 일제히 김현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저 무덤덤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저마다 결 과를 짐작했는지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 사장실로 안내된 그들은 처음엔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런 분 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서 차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고, 이거 퇴짜맞은 저희보다 사장님 쪽이 더 시무룩하시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 오. 이 일을 하다 보면 저희들한테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서 차장의 붙임성 있는 말을 들은 승주는 그제서야 미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내일은 저희 회사 본사 건물과 공장 부지를 한 번 견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 진행 하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뵙죠." "예, 그렇게 하죠. 오늘은 저희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시간 운전을 했더니 좀 피곤 하네요." "그러고 보니까 벌써 식사할 시간인데 장 상무님과 같이하고 가시죠. 서 차장님도 저녁 드시고 가세요." "고맙습니다만, 오늘은 그냥 가겠습니다. 내일 일정 끝나고 같이 식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CF를 다시 제작하기로 하고, 광고에 대한 의견을 좀더 주고받은 뒤 현호와 서 차장은 사 장실을 나갔다. 승주는 건물 로비까지 나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승주의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달부터 방송국에 광고를 내보내기로 계약을 했 는데 이렇게 광고가 어긋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벌써부터 그녀를 잠식해 왔다. 외부 손님과의 미팅을 끝내고 승주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진이 회사 앞에서 여느 때 처럼 대기학 있었다. 승주가 몸을 싣자 차는 집으로 향했다. "누님, 오늘은 다른 날보다 많이 피곤해 보여라." "그래, 조금 피곤하다." "광고는 잘 됐는가요? 오늘 시사회 있다고 들었는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승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승주 누님, 제 얘기 듣고 있는 거여라?"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신다요?" "응, 아니야. 서울에 있는 광고 대행사에서 손님이 왔었어. CF를 다시 제작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서울에서 여기로 내려오니까 거리도 만만치 않고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더라. 원래는 내가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지난번에 누님이 서울에 올라가셨응께, 요참엔 그쪽에서 왔으면 그걸로 된 거제 꼭 시골 에서만 올라가른 법이 있다요?" "그래도 여기서 서울까지 거리가 좀 멀어야지." "누님도 그렇게 왔다 갔다 혀 놓고 그라요.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왜 누님만 서울가는 걸 고집한당가요?" "......." "누님, 혹시......." "그만 두자. 나, 눈 좀 붙일 테니까 집에 도착하거든 깨워줘." 승진은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며칠 뒤 김현호에게 새로 제작한 CF가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승주는 큰오빠 집에 도 잠깐 들를 겸 시사회에 혼자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비행기를 탔다. 큰오빠 집에는 올케 영은과 조카 지윤이밖에 없었다. "아가씨, 오셨어요. 광고 일은 잘 됐어요?" "그 일 때문에 올라왔어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네요. 대행사에 맡기기만 하면 다되는 줄 알았거든요. 광고를 다시 제작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잘 됐으면 좋겠어요. 요즘 날씨가 후텁지근하죠? 뭐 마실거라도 갖고 올까요?" "아이구 됐어요. 올케 시집살이 시킨다는 말 듣게요? 목마르면 제가 갖다 먹을게요. 지윤 이 많이 컸네." 승주는 오랜만에 보는 지윤에게 연신 입맞춤을 해 주고는 올케 앞으로 앉혔다. "또래 아이들보다 배는 커요. 19개월 지났다고 하면 안 믿더라니까요." 영은의 치맛자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지윤을 내려다 봤다. "지윤아, 고모한테 인사도 안해?" 지윤은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승주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 낯가릴 때라 그런지 오랜만에 보거나 처음 보는 사람과는 반나절 이상 같이 있어야 잘 따르더라구요." 승주는 지윤의 머리를 매만지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 "지영 아빠, 오늘 늦는다고 했으니까 우리 일찌감치 저녁 먹고 어디 산책이라도 나가는 게 어때요?" "오늘도 변론 준비하느라 늦는대요?" "그건 아니구요. 오빠가 아직 아무 말 안 했어요?" "무슨 말이요?" "당분간 사무실 휴업하기로 했어요." 승주는 뭔가 잘못 들었지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무실을 당분간 휴업하기로 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은은 꼭 다문 입술을 열며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언제나 난처할 때면 그녀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오빠는 다시 공부하고 싶은가 봐요. 이번에 맡은 사건으로 자기 위치가 갑자기 급상승해 버린 것 같아 부담이 되는가 봐요. 저도 그 정도밖에는......." 사실은 남편의 변호사 휴업이, 학교 강단으로만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서도 영은은 승주에게 가볍게 대꾸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경주를 사랑하며 존경하는 영은 으로서는 경주가 승주에게 직접 얘기하도록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자세한 얘기는 오빠에게 들어야겠지만 아버지가 많이 서운해하실 것 같네요. 얼마 전에 오빠가 아침 토크쇼에 나온 날 있잖아요. 그 시간까지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거 처음 봤어 요. 녹화까지 해 놓고 지금도 두고두고 보신다니까요."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들어가는 영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승주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쩜 그게 오빠의 길일지도 모르지, 오빠는 결코 시세에 고이지 않을 사람이야.' 경주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자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들었던 '비교법 강의' 에 매혹이 된 경주는 법조인보다는 강단에 남아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 겼다. 그러나 고향에서 오로지 자신의 입신 양명을 고대하는 아버지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자신의 그런 신념을 자꾸 흔들리게 했다. 벌써부터 사회에 발을 내딛거나 암자, 고시원 등에 들어가는 동기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 욱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는 고민 끝에 아버지께 자신의 듯을 말씀드리기로 했 다. "아버지, 우선은 대학원에 가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상심이 크실 줄 잘 압니 다. 하지만 꼭 교수가 되어서 아버지의 바람들을 모두 채워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렵게 입을 뗀 아버지는 경주의 두손을 꼭 잡았다. "니도 많은 고민을 허고서 그 길을 택했을 팅께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겄냐. 그래 나는 니만 믿는구먼. 어려운 일 있거들랑 지체말고 집으로 즉시 연락혀라. 언제나 건강혀야 허고 공부도 열심히 혀라. 고널 틴디 가서거라." 의외로 쉽게 떨어진 아버지의 승낙에 경주는 더욱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당신의 굽힘 없 는 의지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주는 아버지께서 내려 주신 동의에, 결코 헛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전공하고자 하는 비교법 강의가 있는 학교 를 찾기 위해 대학원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내에서 비교법을 강의하는 대학은 몇 안 되었다. 경주는 대학원의 성향을 파악한 후 여 러 조건을 따져, 비교법으로 명성이 높은 광주에 있는 전남대 대학원으로 진학을 결정했다. 전남대의 캠퍼스는 서울대와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암울한 1980년대의 미주화의 징 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더불어 현대사를 민주화의 승리로 이끈 학문의 전당이기에 행동하는 법학을 지향할 경주로서는 전남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법대 건물로 올라가는 얕은구릉을 학생들은 관현로라 불렀다. 그 곳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박관현이란 학생의 정신을 기리는 비까지 세워져 있어. 해마다 신입 생들이 입학하면 선배들은 후배를 데리고 맨 먼저 찾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경주는 그 길을 걸으며 캠퍼스의 분위기에 더욱 젖어들었다. 마침 민주와 건주, 막내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생활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한 민족 신문사' 에 입사한 영진이 지방 주재 기자로 광주에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석사 1년차임에도 마침 학과실의 조교 자리가 비어 있어서 경주는 법학과 조교를 겸하여 용돈 정도는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었다. 적색 벽돌 건물의 1층 맨 왼편의 법학과 과 사무실은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낮에는 과 사무실이었지만 밤이 되면 그 곳은 경주의 연구실이 되었다. 그는 대학 신문사에 서 주관하는 학술 논문에 당선되면서부터 이곳 저곳에 비교법에 대한 글들을 계속 투고하며 자신의 입지를 키워 나갔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각종 세미나가 열렸다. 과 사무실 일이 있는 평일에는 참석할 수 없었 지만 토요일에 열리는 세미나는 빠짐없이 쫓아다니면서, 적극적인 논박과 답변들을 하면서 자신을 부각시켰다. 술을 좋아하던 경주는 제법 얼굴을 익힌 학부생들과 종종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스스럼없 이 시세 얘기도 나누는 여유도 보였다. 경주는 학부생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법률 문제를 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경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학생들에게 성의껏 가르쳐 주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곤란한 문제를 물어 오면 밤을 세워 책을 뒤지고 자신의 서브 노트 구석구석을 찾 아 해결하고는 새벽이 어스름하게 밝아 올 때쯤이야 책상 위의 스탠드를 끄곤 했다. 때로는 그의 연구실에 종종 방황하는 후배 녀석들이 술과 안주를 사 들고 와서 고민을 얘 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1년을 보낸 초겨울의 어느 날 학과장이 경주를 불렀다. "어서 오게. 자네 학부 때 지도 교수가 오상천 교수였다고 하던데, 맞나?" 경주는 연구실 안의 빼꼼한 서재를 바라보다가 학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네, 민사법의 오상천 교수님이셨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 교수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자네를 부른 것이네. 이번에 국비로 유학 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네. 사실 이 건은 원래 서울대로 배정된 것이었는데 오 교수 가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우리 대학으로 양보했다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경주는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 왔다. "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그런 자격이 없으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하겠나?" 경주는 벅차 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경주는 아버지가 생각나 교수님과의 얘기를 마치고 곧바로 진도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 다. "워따메, 이거 경주 아니여? 연락도 없이 내려왔당가." 김제 댁이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다가 대문을 들어서는 경주를 보고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 집에 상의하러 왔어요." 김제 댁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당으로 나섰다. "어머니 밭에 나가셨어요?" "들어오실 것이구먼. 저녁거리 좀 있나 싶어서 나갔응께. 양반은 못 되겄네. 성님, 지금 오 시요이." 어머니는 대문으로 들어서며 경주를 보자 놀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니가 먼 일이다냐? 아무 연락도 없이 저녁밥은 묵은 거여?" "아뇨,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 나올게요." 경주는 지퍼가 고장나 닫히지도 않는 체육복 윗도리에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내려왔 다. "경주야, 나가서 니 아부지 좀 모셔 오거라." "때 되면 배도 안 고픈지 한 번 나가믄 들어오려고 하들 않는단께. 식사 때만 되면 일을 두 번 허게 안 허겄냐." "다녀올게요." 얼마 후 아버지는 수건으로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경주와 나란히 들어왔다. "경주 아부지, 배도 안 고프요? 허구헌 날 그라고 나가 있으면서 집에 있는 살마 생각도 혀야제. 나도 노는 사람도 아닌디 좀 알아서 때되면 들어와 드시고 혀면 좀 좋다 안 혀요?"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세숫대야에 물을 두어 바가지 퍼부었다. "니는 머하고 그렇게 멀뚱거리고 서 있냐? 정 할일 없으면 신문이나 보고 있제." "아버지, 저....... 학교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어디 좀 나갔다 오라고 하는데요." "가긴 어딜 가냐? 한참 공부혀야 허는 놈이." 난데없는 경주의 말에 아버지는 눈이 휘동그래졌다. "그게 아니구요, 독일 유학을 1년 반 정도 학교에서 공짜로 보내 준다는 소리예요." "머시여, 유학이라고?" "네, 아버지." 부엌에서 저녁 준비에 한창이던 어머니와 김제 댁이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뛰어 나왔다. "경주, 시방 머라고 혔냐?" 어머니가 확인하듯 물었다. "서울서 대학 다닐 때 제 지도 교수님이 추천해서 가 수 있게 된 거예요. 저도 지금 막 학과장님께 얘기 듣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먼저 알려 드리려고 이렇게 한걸음에 왔어요." "그럼, 진짜 공짜로 1년 넘게 유학 댕겨올 수 있는 것이여? 성님, 우리 경주가 똑똑혀서 공짜로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허니 성님은 잘난 아들 둬서 좋겄어라." 김제 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뱉었다. "독일이면 여기서 많이 멀다냐?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모르겄고."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에요. 저녁 먹고 어디에 있는지 지도에서 보여 드릴게요." "장허다, 장혀. 우리 큰아들, 수고혔다. 서울에 있는 교수가 추천한 것이믄 진자 갔다 올 수 있는 거겄제. 안 그렇닥요, 경주 아부지?" 경주의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아버지도 묵묵히 있다가 끝내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지 경 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잘 혔다, 준비 얼른 혀서 잘 댕겨 오거라이. 이번 주말에 애들 다 집으로 내려오라고 혀."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경주 저 놈은 꼭 큰인물이 될 것이여. 내 몫꺼정 허려면 아직도 멀었구먼.......' 아버지는 그저 큰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며칠 후, 경주는 독일로 1년 6개월 동안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법학의 나라, 소수의 의견 이 존중되며 특히 유학생에게 특혜가 많은 독일은 비교법을 공부하는 데 가장 좋은 곳이었 다. 유학을 떠나기 전 고향에 내려간 경주는 다시 아버지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아버 지는 평생에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외국으로 아들이 유학을 간다는 것이, 그것도 장학생 자 격으로 간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게 여겨졌으며, 교수를 목전에 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 러웠던 것이다. 어머니는 떠나는 경주 앞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행주치마만 만지작거렸다. "워따메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단가!" "사내는 자고로 큰 뜻을 세울라믄 넓은 세상을 봐야 헌다드만 인자 우리 경주는 갖출 것 다 갖췄응께 필시 큰 일을 헐 것이랑께." 그 해 겨울, 경주는 패기에 찬 젊음과 야심을 품고 독일의 쾰른으로 향했다. 친구 쾰른에서 귀국한 날 저녁, 경주는 우영을 만나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주가 연락도 하지 않고 귀국했음에도 우영은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경주가 간단한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막 출구를 나설 때 저만치서 경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경주는 1년 6개월 사이에 몸이 몰라볼 만큼 불어 버린 우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주가 손을 들어 보이며 우영이 서있는 쪽으로 뛰어가 단숨에 그를 끌어안았다. 경주는 감았던 팔을 풀면서 우영에게 말했다. "너 몰라보겠다. 왜 이렇게 몸이 불었냐? 기자라면 원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든 거 아니냐?" 우영은 경주의 오른쪽 옆구리를 살짝 찌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야, 너도 한 번 애인 생겨 담배끊어 봐라. 그러면 너는 덩치가 나보다 크니가 더 할 걸?" 경주는 우영의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불룩 튀어 나온 우영의 배를 툭 치면서 말했 다. "녀석 나 없는 그 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렀구만. 그래, 어떤 여자냐?" 우영은 특별히 자랑할 게 없다는 투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원에서 피아노 가르쳐. 내가 쫓아다닌 것도 아니고 또 선을 본 것도 아니야. 방송국에서 같이 근무하는 선배의 처젠데 한 번 만나 보라고 해서 그냥 기 대하지 않고 나갔는데 서로 인연이 닿았는지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경주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영을 보는 것이 흐뭇한지 그가 말하는 동안 줄곧 미소 를 거두지 않았다. 공항을 나선 두 사람은 우영의 차를 세원 놓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어때, 이젠 제법 법전 맛이 느껴져?" 우영은 유학을 갔다 온 소감을 묻고 있었다. "전부터 비교법을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에서도 전공했고, 또 독일에 가서도 그쪽을 집 중적으로 연구했어. 뭐랄까, 푸르게 밝아 오는 새벽길에 서 있는 느낌이야. 어떻게 더 구체 적으로 표현하기가 그렇다." "짜식, 독일에 있다 오더니 제법 시인 흉내를 내려고 하네." 차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차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느껴졌다. "내가 다 너를 위해서 최상의 서비스를 준비했다. 이렇게 친구를 위해서 냉방까지 생각하 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 경주는 우영의 배려에 만족하며 운전대 위에 얹은 우영의 야무진 손을 넌지시 바라보았 다. "이거 황송해서 감히 앉지를 못하겠구만." 우영은 백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경주를 보며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러고 보니 너 독일물 먹고 오더니 귀공자 다됐다!" "귀공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우영의 과장된 말투를 트집이라도 잡을 듯이 경주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송곳 같은 질문은 아직도 여전하구만." "사실 방송국 기자 오래 해 먹으려면 이런 아부성 칭찬 정도는 필수지. 안 그래?" "기자 생활은 할 만하냐?" "나야 뭐, 원래 이 길에 들어서기 원했던 몸 아니냐."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냐?" "제가 알아서 모시죠." 우영은 잇는 힘껏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대학 시절 두 사람이 자주 드나들었던 신림동의 한 주점을 찾아갔다. 우영과 경주는 어느덧 얼큰하게 취했다. 경주가 술병을 들어 우영의 잔 을 가득 채웠다. "독일에 있을 땐 생각 안 해 봤는데 여기 오니까, 사시 볼 생각이 불숙 솟는군." "그래, 잘 생각했어. 어차피 그거 합격한다고 해도 자네 공부하는 데 해 될 것 없으니가. 자네라면 두 가지 모두 해낼 수 있을 거야. 당연하지, 암." 둘이는 채워진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벌써 소주 두병을 비운 상태였다. 깡그리 지 워져 버렸으리라 생각했던 옛 추억들이 취기로 인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영이 안주를 집 으며 고교 시절 얘기를 꺼냈다. "자네 고등 학교 때 물 찬 제비였지?" 우영은 경주의 왼팔을 흔들며 놀리듯 말했다. "그럼, 자네는 여학교 담장 밑의 하이에나였겠군." 여전히 당해 낼 수 없다는 듯 우영은 두 팔을번쩍 들며 실소를 흘렸다. 둘이 주고받은 말 들이 너무나 우스웠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보며 웃었다. 사실 남자들끼리의 의리도 의리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을 더욱 돈독하게 묶어 주 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여지껏 단 한 번의 삐그덕거림도 없었던 우정이 한몫 톡톡히 했다. 그 날 저녁 폭음을 한 경주는 우영의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일찍 시골집으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상원리입니다." "어, 승주구나! 나 큰오빠다. 어제 귀국했는데 우영이하고 술을 좀 과하게 해서 이렇게 연 락이 늦었다." "오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귀국하면 어떡해요. 정말 서울이에요?" "미안하다, 내려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아침 먹고 바로 출발 할 테니까 그렇게 말씀드려. 어른들은 다 계시니?" "아니......." 집안 소식을 승주에게 간단하게 전해 듣고는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다급하게 승주의 목 소리가 들려 왔다. "오빠 끊지 마! 진도에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 승주야, 차근차근 얘기해 봐." "저......, 오빠 사실은 엄마랑 아버지 영진 오빠 집에 가셨어. 그게, 그게 말이야. 어제 영진 오빠가 인양됐어." 경주는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양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승주야, 처음부터 자세히 말해 봐." 경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승주는 울먹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영진 오빠가 죽었어.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그만......." "승주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영진이가 죽다니?" 경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녀석, 영진이 너,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갈 수가 있어....... 거긴 네가 갈 곳이 아니잖아, 영진아.......' 주저앉아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쓰린 속을 움켜쥐며 터미널로 향했다. 경주는 서울을 벗어나기도 전에 어제 마셨던 술찌꺼기들을 게워 냈다. 시큼한 위액이 올라왔다. 경 주는 봉지를 옆으로 치우면서 차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경주는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재작년 겨울을 떠올렸다. 그가 독일로 떠나던 날 영진은 광주에서 올라와 출국 카운터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해 주 었다. 대기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둘은 짧은 시간 동아 s사나이들의 야욕을 허심 탄회하게 주고받았다. 서울발 프랑크푸르트행 출국 메시지가 한국어와 영어로 번갈아 가면서 공항 내로 울려 퍼 졌다. 영진이 먼저 일어서면서 경주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네가 독일에서 돌아올 때쯤엔 모든 것이 단단히 변해 있을 거다. 귀국할 때는, 심장 단다 나게 쥐고 한국 땅에 내려서야 할거야." 영진의 자신만만한 패기에 자못 믿음이 간 경주는 한 마디를 건네고 출국 게이트로 달려 나갔다. "그래, 영진이 네가 어떻게 내 심장을 떨어뜨리나 두고 보자."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던 혈기를 끌어 모아 서로의 미래를 확신하며 헤어졌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 사람은 이렇게 뭇 사람들의 관심 속에 나타났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채로 그 당당하던 맹세는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영진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영진이 뒷좌석에서 그의 목덜미를 두 손에 포개어 쥐고 쾌활한 웃음으로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만 같았다. 경주는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단지 서녀 명만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 었다. 경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울었다. 친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나오 는 눈물이었다. 콧물까지 훌쩍이며 괴로워하는 그에게 옆에서 계속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젊은 양반이 보기보단 몸이 안 좋으시구만. 속이 상당히 안 좋은 모양이니 약이라도 사 먹어야겠어요." 경주는 아주머니의 근심 어린 걱정을 들으며 그녀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 경주는 차창으로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발갛게 충혈된 두 눈 가를 어루만지며 영진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영진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고향집에 도착하면 영진이가 마중 나와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가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경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묻어 나왔다. 영진과 지내 온 시간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도무지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 았다. 그런 경주에게서 녀석의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당연히 억지였다. 고속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자 경주는 속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소에는 공 중 전화 부스가 늘어서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곳을 지나치려다 문득 우영이 생각났다. 발길을 멈추고 전화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우영아, 나다." "어디냐? 잘 안 들려. 주위가 왜 그렇게 시끄럽냐?" "여기 죽암 휴게소인데 옆에서 전화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 "벌써 거기까지 간 거야? 근데 너, 술이나 깨고 간 거냐?" "안 그래도 국물 있는 걸 좀 먹으려고 하던 참이다. 그런데 넌 언제 진도에 내려올 수 있 는 거냐?" "경주야,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마침 오늘 광주에 취재가 있어. 나도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너 먼저 가 있어." "알았어. 그럼, 이따 보자. 내려올 때 운전 조심하구." "임마, 속이나 풀고 내려 가. 우동이나 한 그릇 먹어라. 알았지?" "고맙다." 경주는 통화를 끝내고 우영의 말대로 우동을 시켰으나 절반도 비우지 못하고 차에 올랐 다. 고속 버스가 광주에 닿을 때까지 두 번의 구토를 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 다. 광주 공용 터미널에 닿자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경주를 깨우며 안쓰러운 눈 빛으로 바라보았다. 경주는 다시 진도행 직행 버스에 올랐다. 무리한 행군이었다. 오후 4시경에 마을에 도착한 경주는 영진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흰 천으로 덮인 채 말없이 눕혀 있는 영진을 감싸 안 듯 목관 위로 쓰러져 버렸다. 경주를 발견한 남산 댁은 경주의 누렇게 뜬 얼굴을 보고 놀라면 서 김제 댁과 함께 부축해 집으로 경주를 데려왔다. 승주가 아침에 경주와 통화했던 얘기를 하자 김제 댁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아이고, 그저 친구라믄....... 으짜든지 지 생각은 않고 단번에 내려왔구만. 시상에나 저 몸 을 혀고도 올 심이 으디서 나왔는지 몰러, 쯧쯧쯧......." "그만 허게. 죽마고우였는디 충격이 얼마나 컸겄는가? 눈이나 조금 붙였으면 좋겄는디....... 자네, 부엌서 해장할 만한 것 좀 내오게." 어머니는 경주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예, 알았구만이라." 영진은 대학 시절부터 언제나 군민이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지역 신문이 필요하다 는 얘기를 자주 했다. 지방화 시대를 맞아 군민의 알 권리와 행복 추구권이 신문으로 인해 획득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학 시절 영진은 방 안 가득 지역별 특성대로 신문스크랩한 것들이 쌓여 있었고, 부전공 인 행정학에서 뽑아 낸 지방 행정 자료들을 모아 놓고 있었다. 영진은 경주가 독일로 유학 간 사이 한민족 신문사를 퇴사했다. 그는 이전부터 꿈을 키워 왔던 지역 신문 창간을 위해 이전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직 신문사 창간에만 온 힘을 기 울였다. 영진은 6개월 가량을 이곳 저곳으로 발빠르게 뛰어다녔다. 거의 소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결코 시간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의 의지와 뜻은 너무나 단호했다. 영진의 지역 사회 발전에 대한 집념과 끈질긴 승부 근성 자체만으로도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패기로 넘쳐흘렀 다. 신문사를 창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영적으로 뒷받침이 되어 줄 주주들과 편집 위 원들, 그리고 몇 명의 직원들이 필요했다. 그는 군청과 도청을 수없이 드나들며 군민 신문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손을 써 본 셈이었다. 결국 그런 그의 노력들은 자신이 세우려던 신문사가 공보처에 등록되어 신문출간 허가증 을 받아 냄으로써 1차적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다. 영진의 열성으로 인해 차차 사람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다. 약소하지만 군에서 재정 지원 이 뒤따르면서 영진은 3명의 편집 위원과 밤낮없이 각종 신문사들을 돌아다니며 경영과 신 문발간에 필요한 자료들을 섭렵하기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엇보다 영진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군민들의 지대한 관심과 호응이었다. 창군 이래로 처음 생기는 군 신문에 군민들 또한 몹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신문이 생김으로 써 문화와 예술의 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바람들로 영진 못지 않게 들떠 있었던 것이었 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신문사의 터전을 닦아 놓고 영진은 떠나 버린 것이다. 8월부터 배포될 신문에 '환경 오염과 관광 자원' 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영진은 진도 바위산 해수욕장으로 갔다. 어느새 붉게 타오르고 있는 해의 몸뚱이가 아쉬운 듯 바다로 곤 두박질하며 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수평선이 붉은 물감을 물들인 것처럼 조그 맣게 원을 그리며 파동을 쳤다. 홍보가 덜된 해수욕장이라 행락객의 대부분은 인근 주민들이나 근처 도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제법 바닷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래사장을 나왔다. 한 여자아이가 추운지 모래를 깊게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어깨를 떨면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바닷가 기슭 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방금 물에서 나왔는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검게 탄 어깨로 흘러내렸다. 주위 사람들 이 아이의 놀란 얼굴에 더 긴장하여 그 아이를 주시했다. "저기요, 저기......." 아이는 숨이 벅찬지 울먹거리기만 할 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기 제 동생이 물 속에 빠졌어요." 아이는 부모나 일행을 못 찾았는지 흐느끼며 살려 달라는 말만 연거푸 하였다.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는데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 고 하지 않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뿐이었다. 아이의 바짝 겁먹은 목소리가 사람들의 애를 태울만 했지만 하얗게 질린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도무지 발걸음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습한 바닷바람이 모래를 끼고 불어 왔다. 한참 행락객과 인터뷰를 하고 있던 영진은 손에 든 수첩과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가 있는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영진은 우선 울고 있는 아 이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영진은 우선 아이를 진정시켰다. "아저씨, 살려 주세요. 저기 제 동생이 물 속에 빠졌어요. 제 동생이 죽어요, 빨리 살려 주 세요, 아저씨." "죄송하지만 이 아이 좀 보살펴 주세요." 영진은 옆에 있던 젊은 여자에게 다급히 말하고 재빠르게 옷을 벗었다. 아이를 구하러 물 속에 뛰어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영진만 주시할 뿐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방까지도 영진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는데 잠수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물에 빠졌던 아이의 몸 일부가 물위로 떠올랐고, 해수욕장을 에워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 두 그 곳으로 모아졌다. 물에 빠진 아이의 상태를 딱히 꼬집어 단정지을 수 없었지만 아이의 몸이 곧 물위로 완전 히 떠오르고, 동생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한 아이는 놀라 기절했다. 그러나 아이를 구하러 들어간 영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막상 바다로 뛰어 들긴 했지만 수심도 생각보 다 깊었으며 조류마저도 빨랐던 것이다. 영진은 물 속으로 잠수하자마자 아이를 발견했고,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 가까이에 있는 바위위로 밀쳐 낸 다음 헤엄쳐 나오려던 순간, 잠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바위에 파도가 덮 쳐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영진은 몸의 중심을 잃었고 순식간에 파도에 떠밀려 갔다. 해양 경비대가 도착하여 영진이 구해 낸 아이에게 인공 호흡을 했고 잠시 후 아이는 눈을 떴다. 영진이 좀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해양 경비대가 수색 작 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영진의 사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영진이 실종된 지 사흘만에 인근 섬 기슭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날은 경주가 독일에 서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발을 디딘 날이기도 했다. 발견 당시 영진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사인은 심장 마비였는데 아마도 가슴에 두 손을 모은 것은 심장이 조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던 영진이 못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영진의 모습이 생생한 경주는 한없이 무엇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 고, 누구보다도 영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마루에 걸터앉아 혼 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쉽게 죽으려거든 이 심장이나 먼저 떨어뜨리고 갈 것이지.' 스물아홉.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경주는 마치 영진의 죽음이 자신의 몫을 대신해 준 것은 아닌가 싶어 더욱 괴로웠다. 경주는 담배 불씨를 꺼 마당 저 편으로 재빠르게 던졌다. 영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주는 평상시 영진의 일과 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변함없는 후원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영진이 걸었던 길을 이젠 자신이 걸어야 한다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경주는 거의 살인적으로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운림산방 정자나무 아래의 시냇가 로 나갔다. 한낮이라 사람의 그림자는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미루나무 그늘 에서 땡볕을 피해 드러누워 있는 흑염소 세 마리를 제외하고는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경주는 둑에 못을 박은 듯이 앉아서 흘러가는 시냇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 을미동도 않은 채 앉아 있던 경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시냇가로 내려섰다. 폭이 대여섯 뼘도 안 되게 흐르는 시냇물을 들여다보며 경주는 다시 영진의 얼굴을 떠올 렸다. 영진은 유난히도 일에 대한 열정과 고집이 대단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의심이 날 때면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던 영진의 얼굴이 시냇물 위로 또렷이 솟아났다. 물에 손을 담그려던 경주는 물위로 떠오른 영진의 얼굴이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그 만두었다. 시간이 갈수록 영진의 모습은 더욱 또렷이 되살아났다. 경주는 시냇물을 뒤로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방에 들어선 경주는 생각들을 차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을 잃고 거 리고 내팽개쳐진 영진의 신문사를 자신이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하려 면 경주가 계속해야 할 학업은 우선 접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될 성싶었다. 경주는 자신이 유학 가 있으면서 친구의 괴로움을 함께 나 누지 못했던 것을 지금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다음 날, 영진은 평소 그를 아끼던 마을 사람들의 서글픔 속에 한 줌의 재가되어 해수욕 장의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취재 때문에 늦게 도착한 우영은 화장터에서 목놓아 울었다. 영진이 잠든 모래사장에서 경주와 우영은 땅거미가 지도록 떠나지 않았다. 경주는 영진의 장례식을 치른 뒤 바로 광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거의 폐차 직 전의 차처럼 허름했다. 경주는 중간쯤 자리를 잡고 매캐하게 코를 찔러 오는 에어컨 바람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방금 터미널에서 사 온 스포츠 신문을 펴 들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지 않던 신문이었지만 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법 쓸 만했다. 영진을 생각하면 경주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 다. 그가 차에 오른 지20, 30분 정도 지나서 운전사가 차에 올랐다. 그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라디오를 켜고는 볼륨을 높였다. 날카로운 기계음이 들리고 곧 이어 정오 뉴스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는지 잡음이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운전산 느 신경질을 내며 라디오를 꺼버리고는 트롯 테이프를 크게 틀었다. 관광 버스를 탄 것 같 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객 중 어느 누구도 스피커에서 찢어질 듯이 나오는 소리에 신 경을 쓰지 않았다. 경주는 자신의 자리 위에 있는 스피커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좀 멀찍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자리에 앉아 운전사는 경적을 크게 두 번 울리고는 승강장에서 차를 빼 차머리를 돌렸다. 신문의 연예 면에는 거의 모르는 얼굴들이었고, 대부분 그가 알지 못하는 신인들의 스캔 들뿐이었다. 연예 면을 훌쩍 넘어서 스포츠 면을 펼쳤다. 스포츠 면 역시 프로 야구 소식과 씨름 선수들의 뒷이야기들이어서 읽을 거리가 거의 없었다. 버스가 해남 외곽으로 빠졌다. 넓게 펼쳐진 들녘으로 다 자란 벼들의 물결이 파도처럼 출 렁거렸다. 갑자기 그의 답답함이 확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제서야 경주는 자신이 광주 로 향하면서 기지개 한 번 제대로 켜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신문을 접어 무릎 앞의 그물망에 끼우고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의 뒷좌석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의자를 끝까지 젖힐 수 있었다. 두 손에 깍지를 끼고 팔을 뒤쪽으로 힘껏 늘 였더니 힘줄이 당겨 왔다. 한참을 그 자세로 있던 경주는 깍지를 풀고 손을 배에 얹은 채 잠을 청했다. 경주는 버스가 광주에 도착하자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화들짝 깨어났다. 그는 눈곱을 떼 내며 버스에서 내렸다. 승강장에서 조금 기다리자 전남대학교로 가는 시내 버스가 그의 바 로 앞에서 멎었다. 1시 30분이 조금 넘은 대낮임에도 앉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대학이 주택가와 시내 사이에 위치한 탓에 언제나 그쪽으로 가는 차는 사람이 많았다. 터 미널에서 학교까지는 15분 정도 걸렸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위가 변한, 대학 정문 쪽을 향 해 걸어가던 경주는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 볼 셈으로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보았지만 별 효 과가 없었다. 한낮 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그는 4차선 앞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바로 앞으 로 펼쳐진 교정은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푹푹 찌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자연 에 녹아 있는 싱그러움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상큼한 녹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짙푸른 메타세쿼이아가 즐비하게 늘어선 교 문 앞을 지나 법대 앞의 비스듬히 누운 작은 동산에는 여고생들이 운동화로 잔디를 짓이기 며 말타기에 열심이었다. 경주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추억처럼 기억 저 편에 자리한 한 소녀를 떠올려 보았다. 배영은. 생김새처럼이나 야무진 아이였다. 세 번째 그 아이를 만났을 때 경주는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친절한 오빠 이상은 되어 줄 수가 없었다. 대학원 석사 1년차 때 경주는, 가을에 나주 금천으로 다시 두 번째의 민원 법률 상담을 나갔었다. 물론 그 때는 정식 상담 요원으로 참가했었다. 그 날 법률 상담을 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과 상담 요원들이 농민회 총무를 알게 되어 그 집에서 저녁 식사까지 대접을 받았다. 경주가 저녁을 먹고 동네 어귀를 나서려던 찰나에 학 교에서 귀가하던 영은을 만났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영은은 황급히 눈길을 돌리고서 마 을길로 사라져 버렸다. 경주는 며칠을 영은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다. 추억에 젖어서 관현로를 오르던 경주는 법과대 건물을 지나 농대 쪽으로 한참이나 걸어갔 다. 정신이 든 경주는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발길을 돌려 법과대 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먼저 학과장을 찾아갔다. 마침 학과장은 식사를 마치고 연구실에 있었다. 학과장은 경주가 들어서자 반색을 하며 물었다. "자네 언제 귀국했나?" "예, 나흘 전에 귀국했습니다. 빨리 찾아 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과장은 경주의 말을 듣고 손을 가로 저었다. "괜찮네. 지금이라도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래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땠는가?" "교수님 덕분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래, 그랬다니 나도 기쁘구만. 이젠 외국에서 공부도 하고 왔으니 국내에서 그 기량을 맘껏 펼쳐야 하네." 경주는 학과장의 말에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하지만 경주는 탁자 아래로 주먹을 힘껏 쥐 며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잠시 대학원 복학을 유보할 계획입니다." 학과장은 놀란 표정으로 경주를 바라보았다. "......." 학과장은 아무 말도 없는 경주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럼 유학을 다시 갈 셈인가?" "그게 아닙니다. 개인 사정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하려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죽마고우가 며칠 전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본래 그 친구는 지역 발전을 위한 군 민 신문 창간 준비를 한참 진행 중에 있었는데, 그 친구를 대신할 수 있는 적임자가 없습니 다. 우선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만 이라도 제가 그 일을 해 보려고 합니다." 경주의 말을 듣고 난 교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경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은 학업을 접어 두는 수밖에 없겠군. 자네야, 신중한 사람이니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인 줄은 아네만 하나 얘기해 두고 싶은 게 있네. 아무리 힘들더라도 면학의 꿈을 버리지는 말게. 앞으로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하고자 하는 일은 꼭 끝을 복고 잘 마 무리짓도록 하게. 그리고 종종 연락하도록 하게. 허, 아까운 인재를 한동안 볼 수 없게 되어 서운하군." 경주는 자신의 뜻에 생각보다 쉽게 동의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를 드렸다. 다시 진도로 내려온 경주는 자신의 방 귀퉁이에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때 김제 댁이 저녁을 먹으라면서 그의 방문을 열었다. "금방 광주로 올라갈람서 머할라고 착실히도 정리할까이." 의아해하는 김제 댁의 말에 경주는 아무 말도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안방으로 저녁을 먹 으러 갔다. 아버지도 방금 들어오셨는지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계셨다. 수건을 거울 앞에 걸면서 경주에게 물었다. "그래, 오늘 교수님 찾아뵈러 갔다더니 벌써 인사드리고 온거여?" "예, 학과장님과 지도 교수님 찾아 뵙고 인사드렸습니다." 승주와 어머니가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하던 대화를 중단하고 밥상에 둘러앉 았다. 경주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이따금 승주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경주는 식사 후 가 족들에게 그의 결심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에만 매달리며 수저질을 하다 보니 아버지보다도 먼저 그릇을 비우고 말았다. 경주는 물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신 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제법 신선한 바람이 발치로 불어 왔다. 경주는 담배 한 대를 피우려다 상을 들고나서는 승주와 어머니를 보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부축하여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날이 갈수록 노쇠해지시는 할머니는 거의 바깥출입을 못 하셨다. 뿐만 아니라 식사 때 외 에는 거의 대부분을 건넌방에 누워서 보내셨다. 경주는 아버지를 거들어 할머니를 건넌방으 로 모셔다가 이부자리를 펴고 눕혀 드린 다음 그 방을 나왔다. 마루로 나온 경주는 마실을 나가려고 채비를 하는 아버지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한 일이 아니시면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아버지는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으려던 고무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그려. 중한 말인가 본디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허자." 아버지께서 먼저 방안으로 들어섰다. 경주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 다. "무슨 말인지 모르겄다마는 어디 한 번 혀 봐라." 아버지께서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경주를 바라보았다. "저....... 아버지, 대학원 복학을 잠시 유보하고 여기서 영진이가 하던 신문사를 맡아 해 보 려고 합니다." 경주가 말을 하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은 굳어졌다. "머시여? 시방 머라고 혔냐? 그러닝께 공부를 고만 하겄다 이 말이제?" 아버지는 경주가 학업을 포기한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금방 역정을 내며 대뜸 돌아 앉으셨 다. "아버지, 저는 지금 학업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접어 두려는 것뿐입니다. 죽은 영진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진이가 남기고 간 신문사를 바로 세우는 것뿐입니다. 아버지, 저를 믿어 주세요. 결코 아버지의 기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경주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애원하다시피 간곡하게 말했다. 마루에서 경주와 아버지의 얘기를 듣게 된 어머니도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팽개치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야가 시방 무슨 말을 한다요? 경주, 니 공부가 싫어진 거다냐? 무슨 말 좀 혀 봐라이." 어머니는 경주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공부를 그만두겠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경주 아부지, 무슨 말 좀 혀 보쇼이. 야가 지금 큰일날 소리만 한단께." "썩 나가 볼랑께. 아무것도 안 들은 걸로 하겄다." "아버지......."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완강하게 나오실 줄은 경 주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경주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기 만 기다리고 있었다. "애비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여. 경주 니가 영진이랑 그간 지내 온 우정도 내 모르는 바도 아니고, 또 니 놈이 친구 위하는 마음 역시 다른 놈들에 비 해 각별하다는 거 이 애비도 충분히 알고 있단께. 허나 공부는 다 때가 있는 법이여. 멀리 외국 유학꺼정 마치고 온 놈이 이제와 다른 짓을 허겄다니 내 속이 안 뒤집히겄냐. 니도 자 식 새끼 낳아 키워 봐라이. 그 때가 되어야 이 애비 속을 반이라도 이해허게 될 것이구만. 내는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라 지금 니가 허는 말이 배불러서 허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 단께." "아버지, 이번만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학교 교수님께도 미리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습니 다." "머시여? 느그 선상님께도 말씀을 드렸어야? 평생 속 안 썩이고 잘 허던 놈이 부모 억장 을 무너뜨려도 분수가 있제, 이놈아!" 아버지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자 밖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제 댁과 승주는 부자간의 실랑이를 걱정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니가 영지니 신문사를 인수혀서 머에 쓰것다는 것이여 시방. 설사 그렇다고 혀서 니 공 부꺼정 그렇게 방해받으면서 헌다고 혀믄 하늘에서 영진이가 참말 잘 혔다고 허겄다이." "아버지, 저 마음 굳게 먹고 고향에 내려온 겁니다. 제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그렇 게 알고 계세요." 경주는 아버지께 반절을 올리고 안방을 나왔다. 넋을 잃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 며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아버지는 한동안 자리에 누우셨다. 경주가 학업 중단을 결심하고 영진 의 신문사를 잠시 맡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와의 마찰은 상당했지만 경주에게 가족 못지않 게 영진도 중요했다. 영진이 죽은 지 3주가 지났다. 신문사의 편집장을 맡았던 하군이 주축이 되어 건의가 들 어왔다. 군민 신문을 위해 몸소 뛰다가 비명 횡사한 창간 준비 위원장 영진을 위한 시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하 군의 얘기를 전해들은 경주는 또 다른 감회에 젖었다. 경주는 군청을 찾아다니며 성금을 모으고, 허가를 받아서 군청과의 협의하에 읍내 사거리 에 영진의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의 시비가 세워지던 날 참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들고 시비를 찾았다. 무엇보다도 고 향 사람들이 저마다 국화를 한다발씩 들고 왔을 때, 경주는 감정이 복받쳐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잠시 다른 곳으로 피해야만 했다. 읍내 사거리 한 모퉁이는 영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차지한 자리였다. 그러나 평범 하면서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영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경주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윤전기 앞에서 편집장인 하 군과 신문 인쇄 과정을 살피고 있 었다. 기계음이 너무 커서 하 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경주는 오른쪽 귀 로 손을 갖다 대며 하 군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기장 말이 인쇄 끝나려면 9시까지 기다려야 한 대요." "어, 그럼 그 때까지 저녁이라도 들고 오지 뭐." 두 사람은 얼얼해진 귀를 만지며 윤전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들어선 경주는 경리 일을 하 는 미스 조에게 퇴근하라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제가 이 선생님만큼 뛴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만 있었는데 수고는요." 미스 조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핸드백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어제 야근을 한 편집 위원 최 군과 송 양이 퇴근하지 않아 경주가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집으로 보내 버렸으므로 신문사엔 하 군과 경주만이 남았다. 경주가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하 군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부터 컵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더니 속이 꽤나 부대끼는데 어때, 우리 시원하게 뼈다귀해장국이나 먹으러 가는 게. 신문 나오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말이야." 하 군은 찬성이라는 듯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동의한다는 뜻을 해 보였다. 경주가 그 런 하 군을 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 군이 먼저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거의 9시가 가까워서였다. 경주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화벨이 울렸다. 하 군이 먼저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내 옥주 신문입니다. 작업이 다 마무리되었다구요? 예,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예, 감사합 니다." 하 군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경주에게 말했다. "작업이 마무리되었다고 하는 대요. 어떡할까요?" 하 군은 언제나 최종 의사를 경주에게 물었다. 경주는 책상에서 수첩을 꺼내면서 곧바로 하 군에서 내려가자고 했다. "우리가 가서 체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윤전실로 가 보는게 좋을 것 같군." 둘은 건물 지하에 있는 윤전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열기가 확 느껴졌다. 들어 간 지 1분도 채 안 되어 등으로 땀방울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하 군이 신문 한 부를 집어서 경주에게 건넸다. 경주는 방금 인쇄된 뜨끈뜨끈한 신문을 받아 들고는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비록 8절 크기의 여덟 페이지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지면이었다. "드디어 두 번째 호를 받아 보겠구만.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힘든 법인데, 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뛰어 준 덕에 이렇게 별 탈 없이 제 때에 나오게 되어 다행이지." 윤전실 기장이 보조와 함께 경주에게로 왔다. 메리야스만 입은 그들은 온몸이 완전히 땀 으로 젖어 있었다. "이거 날씨도 더운데 이렇게 늦게까지 수고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경주가 공손히 예의를 표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경주는 일이 마무리가 잘 되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론 영진의 생각이 간절했 다. '영진아! 부족하지만 잘 봐 줘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직 멀었어.' 기장이 보조와 윤전실을 나간 후 경주와 하 군은 윗도리를 벗고 면단위로 보낼 신문을 분 류하기 시작했다. 진도는 진도읍을 포함해 7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신문을 인구 비례에 맞춰서 나 누긴 했지만 경주는 집집마다 신문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경주는 신문사 의 살림이 나아지고 주주들도 늘어나면 언젠가는 집집마다 신문이 배달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 보며, 분류한 신문들을 노끈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일할 사람이 턱없이 모자라 밤색 작업 끝에 조판에 들어 갔고, 그렇게 밤을 새울 때마다 경주는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발간이 늦춰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고향의 신문이며, 군민의 신문이다.' 경주에게 있어서 하 군은 누구보다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분별력 이나 추진력이 영진을 많이 닮아 있었다. 하 군은 신문사에는 대표가 꼭 있어야 한다면서 경주에게 신문사 대표 자리를 간절하게 권했다. 어느 날인가 신문을 스크랩하던 경주에게 하 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형, 신문사 일하기 힘들죠? 신문사라고 그럴 듯하게 치장은 하고 있지만 이렇게 하루 가 멀다 하고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마 꿈에도 모를 거예요." 그의 말을 들은 경주가 스크랩하던 것을 밀치고 하 군이 있는 소파로 가 앉으며 입을 열 었다. "내가 이 신문사에 처음 뛰어들었던 건 영진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야.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 처음엔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되어 가고 있고 자네 역시 잘 견뎌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난 지금의 생활에 더 없이 만족하고 있어. 영진이가 남기 고 간 자리가 탄탄하게 굳을 때까지는 결코 이 일에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경주의 말이 끝나자 하 군은 경주에게 담배를 권하며 불을 붙여 줬다. "저는 이 형이 존경스럽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 형을 보면서 더 절감했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하 군은 말을 마치고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허공으로 연기를 뿜어 냈다. 손에 들린 담배 를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할말을 다 못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 형께서 하루라도 빨리 옥주 신문사를 맡았으면 좋겠어요." 하 군은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물론 지역 신문사 대표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영진과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경주가 대표직을 맡아야 하는 이 유가 있었다. 번듯한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일에 대한 순수한 패기로 우정 때문에 신 문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하 군의 지속적인 설득으로 결국 경주는 신문사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는 신문사 대표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이전에 영진의 손이 갔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뒤쫓아가며 차례로 마무 리 작업을 해 나갔다. 그러나 경주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재정 문제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 주는 영진이 광주에 있는 모 은행과 수표 거래를 하려고 했던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영 진 대신 자신의 명의로 변경하는 일이 고민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사업체이건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곳보다 경제력이 튼튼해야 하는 신문사는 자본 을 얼마만큼 잘 운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수도 있었다. 영진의 철두철미한 면을 더듬으면서 경주는 가슴 한켠에서 솟아오르는 힘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러던 중 신문사 건물주인 건설 회사에 다니는 오 상무의 도움을 얻어 쉽게 명의를 변 경 할 수 있었다. 경주의 생각은 오로지 영진의 뜻을 이어 받아 군민의 신문으로 정착시킨다는 것뿐이었다. 신문의 정기적인 발간을 위해서는 고정적인 자본 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경주는 하 루의 반은 진도 관내를 돌아다니며, 고정적인 광고주와 주주를 찾는 일에 매진했다. 경주는 도중에 불가피하게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돈을 건네 받으면서 경주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돈을 건네주는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파리하게 떨렸기 때문 이었다. 아버지가 건네 준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서던 경주는 울대가 떨려 오는 것을 애써 참느라 힘이 들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을 날이 올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 지만 쓰려 오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무려 4개월 동안 고생을 한 끝에 겨우 기본틀만 잡은 채로 신문사를 시작했고, 허가가 난 상태에서 신문을 발행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간판 하나 제대로 내걸지 못하고 있었다. 작업을 해 오던 경주와 직원들은 어느 정도 신문사가 안정이 되자 간단히 돼지 머리와 떡 으 준비해 발족식 겸 현관식을 갖게 되었다. 그 날 신문사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각 관공서는 물론 농협, 수협 직원들, 그리고 신문사 직원 가족 등을 포함해서 족히 2천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경주는 영진의 뜻을 이어 보배의 섬 진도군의 옛 이름을 따서 '옥주 신문'으로 내걸었다. '옥주'라는 이름은 '비옥한 고을'이라는 진도 고유의 이름이었으며 군민뿐만 아니라 향우인 의 여론에 따라 결정된 이름이었다. 이제 경주는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를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 앞으로 지역 사회를 바로 이끌어 갈 신문사의 활동에 기대를 건다며 축하해 주었다. 무엇보다 흐뭇했던 일은 아버지께서 발족식에 오신 것이었다. 아버지도 집에서 옥주 신문 을 받아 보셨다면서 경주의 일을 얼추 짐작은 했지만 막상 발족식에 와 보니 아들이 더욱 믿음직스러워 마음속으로 아낌없는 격려를 해 주셨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문사가 제도적으로 정비되고 직원도 늘고, 살림도 어느 정도 갖 추어졌다. 전국 어느 지방 자치 단체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판단이 되었을 때 경 주는 대학원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주는 자신이 서야 할 곳은 대학의 강단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참이었다. 발족식이 있던 다음 날 경주는 업무가 끝나고 저녁 회식을 겸한 직원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신문사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결심한 듯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젠 신문사의 틀도 어느 정도 잡히고 든든한 주주분들도 모셨으니 제가 이 자리에서 물 러서도 될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부로 신문사 대표직을 내놓을까 하는데 직원 여러분들의 따뜻한 이해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경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편집장 하 군이 일어섰다. "이제 어지간한 큰 일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는데 이제와 자리를 내놓겠다니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설사 지금 어느 정도 신문사가 자리가 잡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해야 할 일 역시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 시점에서 대표직을 내놓는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 다. 지금 저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 군은 손에 든 물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하 군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거의 창단 멤버나 다름없는 경주가 신문사를 떠난다는 것은 그 들에겐 대들보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거나 다름없다고 입을 모았다. 유독 하 군이 펄쩍 뛰 는 것은 그가 그만큼 신문사에 대한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경주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직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 군의 말에 모두 절실하게 동감한다며 경주의 대표 직 사임을 극구 말렸다. 그래서 경주는 다음 해1월까지 대표직을 역임하면서 몸소 사주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건설 회사를 운영하는 군 의회 김 의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역 발전에 힘쓰는 유능한 인물로서 군 의회에서는 가장 장년일 뿐만 아니라 군민의 신망도 높았다. 무 엇보다 믿음이 가는 것은 신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었다. 경주는 설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읍내의 '아세아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제가 직접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무례하게 밖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요즘 옥주 신문은 잘 받아 보고 있습니다. 정말 패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합 니다. 평소에 무척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만나자고 하셔서, 제가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 고 있습니다." 경주는 자신보다 훨씬 장년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갖추어 말하는 김 의원에게 몸둘 바를 몰랐다. "저, 오늘 제가 김 의원님을 이렇게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희신문사 사주를 찾고 있는데, 마침 김 의원님이 적격이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김 의원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유능하신 이경주씨가 있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원래 하고자 했던 학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고인이 된 정영진 군의 뜻을 이어 받아 신문사의 기반을 닦아 놓은 뒤 다시 떠날 생각을 하고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신문 사의 틀도 제법 잡히고 해서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려 합니다. 그래서 김 의원님께 간곡히 부탁 드리는 겁니다. 제 청을 받아 주십시오." 김 의원은 엽차를 내려놓으며 약간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하긴 죽은 영진 씨와 각별한 사이였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시다가 이렇게 선뜻 좋은 자리를 저에게 내놓으시겠다니, 제가 더 아쉬운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아쉽긴 합니다만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모 양이 아닌 줄 알지만 제가 직접 찾아 나선 겁니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지역 신문 창간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리잡힌 신문사를 운영할 기회가 왔으 니 저에겐 더욱 좋지요. 그리고 운영상 당분간은 이 형의 수표를 사용하기로 하고 이번 달 안에 제 명의로 변경할까 합니다. 유능한 오 상무에게 맡기면 잘 될 겁니다." "걱정하던 찰나에 잘 됐군요. 제 명의의 수표나 어음을 꼭 김 의원님의 명의 변경하여 잘 처리하실 줄 믿습니다." 경주는 김 의원의 말에 안심이 되어 다시 확인하듯 말했다. "저도 저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김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는 신문사의 모든 권한을 김 의원에게 일임하였다. 그가 신문사 식구들에게 사임 의 사를 밝히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붙들 수 없음을 느꼈는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나 하 군만은 끝끝내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를 보내는 직원들이 1년을 같이 보낸 정이라면서 경주를 위한 조촐한 송별회를 마련해 주었다. 읍내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호프집에서 그들은 마음껏 취했다. 폭음을 하는 하 군을 보면서 경주는 영진의 모습이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질긴 고집이 영진과 너무나 닮았다.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술집을 나선 그들은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 주와 하 군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신문사로 향했다. 경주가 하 군에게 한마디했다. "그 동안 고마웠네. 이 말 외에는 더 할말이 없군." "이 형은 어디 새로운 곳에 가더라도 잘 할 거예요.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며 제가 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무슨 소리, 오히려 내가 하 군의 도움을 더 많이 받고 배웠는데....... 하 군이 옥주 신문을 잘 지켜만 준다면 내 평생 잊지 못할 은인으로 생각하지. 하 군이 있는 한 신문사는 날이 갈수록 자리를 번듯하게 잡을 거야. 내가 보장하지.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서슴지 말고 연락하구." "걱정 마세요. 이 형도 없는데 저라도 붙들고 있어야죠. 이제 제 집보다 신문사가 편합니 다. 그래도 이 형 그만둔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을 어떻게 감출 길이......." "정말 고맙네." 하 군이 건네주는 열쇠로 문을 열고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몇 번 깜박거리다 환 하게 켜졌다. 둘은 말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경주가 담배를 꺼내 하 군에게 내밀었다. 불을 당기려고 라이터를 찾던 경주는 술집에 라이터를 놓고 온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에 문 담배를 다시 손에 들자 하 군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그 날 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경주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 군은 이미 사 무실을 나가고 없었다. 경주는 하 군의 자리에 메모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하 군, 우린 참 잘 어울리는 콤비였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어 섭섭하네. 언제 진도에 내려오면 들리리다. 자네를 보고 있으면 영진이가 떠오르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네.' 그 날 오후 경주는 미리 짐들을 부쳐 버렸으므로 그대로 광주로 떠났다. 그런데 김 의원 의 배려는 경주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드러났다. 생전에 영진이 투자했던 지분을 계 산하여 영진의 부모님께 돌려보냈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었다. 경주는 자신이 사람을 잘 골랐다는 생각에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신문사를 떠나오면서 무거웠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다. 이젠 경주도 신문사를 잊고 학문에 전 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월이 되면서부터 석사 2년차로 복학을 한 경주는 다시 전남 대학 도서관에서 하루를 분 주하게 보냈다. 도서관 앞의 목련이 뾰족하게 꽃봉오리를 품고 언제 틔울지 모르게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학교 호수에 있는 버들가지였다. 버드나무는 가정대 앞 호 수를 빙 둘러싸고 있을 정도로 수가 많았다. 한 번씩 바람이 불어오면 그 여린 가지들이 윤 기 흐르는 머릿결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혼자 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광경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답답할 때면 그는 정문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기도 하고 때론 호수 주변에 앉아 물 위에서 노는 물오리들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경주 의 그런 여유로운 생활도 잠시였다. 3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다. 경주는 대학원에 복학하면서 같은 학교 학부생으로 다니는 막내 승주와 같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오누이를 보면서 김제 댁이 이런 말을 했었다. "그라고 애끼는 사람덜끼리 인자는 맨날 한솥밥 묵고 살 겄구만. 큰오빠도 없이 객지에 내놔서 성님도 걱정 많이 했는디 인자는 저라고 든든한 오라비하고같이 산께로 성님 맘 놔 도 되겄구만이라." 경주와 승주를 보며 김제 댁이 늘 하는 말이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절친했던 둘은 찰떡같은 오누이였다. 언제나 저녁은 집에서 승주와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 늦어 버린 경주는 급하게 집으로 달려왔다. "오빠, 이제 와? 오늘은 20분이나 늦었네." 아니나다를까 승주는 경주를 기다리며 밥을 먹지 않고 시간만 재고 있었다. "어 그래, 또 늦었다. 나 때문에 매일 미안하다. 먼저 먹으라니까 기다렸어?" 승주는 웃으며 경주 손에 들렸던 책을 받아 들었다. "오빠하고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동생 생각해서라도 일찍 들어오란 말이야. 알았지?" 승주가 건네는 밥공기를 받아 들 때, 전화벨이 울렸다. 경주는 시골집에서 연락일 거라 생 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 형, 나 김 의원이요. 큰일이 생겼어요. 정말 이 형 볼 면목이 없소. 지금 진도로 속히 내려왔으면 좋겠는데......." "무슨 이인데 그러십니까?" "이 형도 오 상무 알죠? 그 놈이 어음하고 수표를 빼돌려서 도주해 버렸소. 시간을 다투 는 일이니 바로 내려왔으면 좋겠소." "예, 잘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승주는 밥술을 뜨려다 말고 일어서는 경주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큰오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어, 승주야 오빠 일 있어서 잠시 진도 좀 내려갔다 올게. 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까 잘 때 문단속 잘 하고, 오빠 없는 동안 조심해야 한다." 차창 밖은 온통 검은빛이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민가의 불빛을 제외하고는 사방은 온통 끝도 없는 어둠이었다. 경주는 왼손으로 턱을 기댄 채로 창턱에 기댔다. 김 의원이 전화상으로 잠시 언급한 오 상무라는 사람을 경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영 진의 수표 건도 해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사의 주주들도 대부분 그를 통해서 포섭했 었다. 김 의원이 하도 다급하게 얘기를 해서 경주는 오상무가 수표와 어음을 빼돌렸다는 것 까지는 알아들었지만 그 다음은 말꼬리를 흐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경주는 불안 한 마음에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가 다급하게 진도행 버스에 오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독일에서 귀국한 다음 날 영 진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서울에서 광주를 거쳐 진도를 향하던 그 때가 생각났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역시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경주가 신문상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신문사 직원들과 김 의원이 신경을 바 짝 곤두세우고 신문사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사무실 안은 매캐한 담배 연기로 뿌옇게 흐렸다. 갑자기 탁한 공간으로 들어섰기 때문인 지 연신 마른기침을 몇 번 거듭하고 나서 직원이 가져다주는 물을 마신 후 진정이 되었다. 김 의원이 경주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오시는군요. 이 형,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난감합니다." 저쪽 끝에 앉아 있던 하 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김 의원을 향해 달려들 기세를 취 했다. "우리 뼈가 으스러지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신문사가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문을 닫게 되다니 이 답답한 심정을 무슨 말로 대신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 군은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을 힘껏 닫았는지 소리가 요란 했다. 다시 김 의원이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신문사가 압류당하게 됐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저의 불찰로 인해 발생한 것이어 서 뭐라 변명할 말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형." "어떻게 된 일이길래 신문사가 압류까지 당하게 됐습니까?" 다소 날카롭게 쏘아붙인 경주는 자신이 흥분했음을 인식하고 재빨리 다시 물었다. "오 상무가 어음과 수표를 챙겨서 도주한 것과 신문사가 문닫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저는 납득이 안 갑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너무 커서 입에 올리기도 두렵습니다. 신문사뿐만 아니라, 저희 회사와 다른 기업들이 사기단에 속아서 60억 원 가량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사기단! 사기단이라니 무슨 말이죠?" 경주가 다그치듯 물었다. "볼륨 있는 해외파 사기단이랍니다." 경주는 그 피해 규모를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최 군이 허탈한 웃음을 띠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미스 조도 그 사람들과 한패였어요. 그래서 현금 출납을 보면서 수표며 어음을 죄 다 오 상무에게 넘겼고, 그걸 가져다 세탁을 해서 돌리는 수업을 이용해서......." 순간 경주의 머리는 기중기에 깔린 것처럼 앞파 왔다. 경주는 먼저 간 영진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학업까지 중단하고 밤낮없이 최선을 다해 옥주 신문을 창간했다. 그리고 지역 특산물 홍보를 위해 신문사 주관으로 '구기자 아가씨 선발 대회'까지 개최하 며 일해 온 보람들이 하루아침에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김 의원은 넘어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끝내 흐느끼고 말았 다. 경주가 들은 사건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인근 도시에서 소형 빌라를 분양해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된 김 의원이 진도에서 건설 회 사를 설립하려던 차에 사기단의 정보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들은 오 상무에게 김 의원과 합 작 회사를 차릴 것을 끈덕지게 권유했다. 결국 김 의원은 오 상무와 합작 회사를 차렸고 그 세를 몰아 오 상무는 적극 김 의원의 홍보에 나서서 군민들에게 명망을 높인 후 군 의원에 까지 당선되도록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김 의원은 그런 오 상무의 높은 수완과 충의에 완전히 현혹되어 대부분의 재정을 오 상무 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그런 기회를 이용해 오 상무는 김 의원의 인망을 미끼로 인근 기업 들에게 수표와 어음을 발행하고 돈을 돌리다가 꼬리가 잡힐 것 같자 고의로 부도를 낸 것이 다. 신문사도, 영진이 군민 신문 창간을 위해 사무실을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오 상무는 자 기 회사의 건물을 임대해 주면서 영진과의 친분을 튼 것이다. 영진이 은행에 수표를 개설한 것도 다 오 상무의 계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사기단 에 은행 차장도 가담해 있어 오상무가 수표를 발행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경주가 영진의 수표를 자신의 명의로 이전할 때도 오 상무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인가 미스 조가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전화 메모를 건네 줄 때였다. 미스 조 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며 오 상무와 건장한 몇 명의 사내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건물을 보러 왔다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갔다. 그러나 그것은 신문사의 수표들을 챙겨 넣기 위한 오 상무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두가 오 상무를 통해 어음 사기단에 말려든 셈이다. 김 의원의 명예는 땅바닥까지 실추되었고 결국 그는 자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가 군 의회에서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인정상으로는 모두 딱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부하 직원이었던 오 상무로 인해 군내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으니 그가 사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경주는 오 상무와 공동 명의로 윤전기 등 기계 구입비용에 서명했던 부분과 유통된 어음 및 수표 때문에 공모범이 되어 구속당하게 되었다. 경주의 갑작스러운 구속으로 인해 경주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 더 했다. 이 사기극은 오 상무의 계획적인 행위였고 그는 미리 사체업자로부터 받아 낸 거액의 기 계 설치비를 유용한 후 경주와 공동 명의로 서명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공모 공동 정범이 될 뻔했던 경주에게 김 의원과 하 군을 비롯한 기계업자의 참고 조사, 그리고 뒤늦게 미스 조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실토한 끝에 몇 차례 검찰 수사를 마치고서야 무혐의로 처리되었 다. 경주는 30일간 구속이 연장되었다가 검찰의 구속 취소로 풀려났다. 그리고 수표를 회수하 지 않아도 불구속 재판으로 진행되었지만, 수표를 회수하려는 것은 전도 유망한 경주의 앞 날에 분명 먹구름 같은 채색이 가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향집의 전답들은 하루가 바쁘게 팔아 치워야 했다. 전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때마다 아버지의 허리는 한 치씩 더 꺾여만 갔다. 미회수 수표만도 무려 17장, 그 액 수는 농촌에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수표 금액 4억 2천만원은 다시 한 번 경주를 멍 들게 한 것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부러질 듯한 아버지는 더욱 쇠약해지셨다. 경주는 도저히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렇게 외양만 보아도 힘겨움이 배어 나오던 아버지는 농토가 압류당하 고 하루아침에 일할 땅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싫은 소리 한번 않으시고 말없이 경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아버지는 면목이 없어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주의 고개를 세워 주며 말씀하셨다. "있는 사람은 쓰는 법을 배워야 혀고, 없어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부자구먼." 이것은 흙에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의 변함없는 신조였다. 경주는 그런 아버지의 배려에 힘을 얻어 점차 기운을 회복했으며, 이번 일을 통해서 무엇보다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를 새삼 깨달았다. 경주가 유치장에 있을 때 또 하나의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은 후배들이었다. 과 조교를 하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후배들이 경주 소식을 듣고는 일부러 찾아와 좋은 책들을 넣어 주 며 위로해 주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기단은 경찰측의 끈질긴 추적으로 3개월만에 모두 검거되었고 경주도 공소 기각 결정이 났지만 오 상무 사기단이 남기고 간 상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거액의 도 피 자금을 마련해 해외로 이주하려던 오 상무를 비롯한 사기단은 고향의 인정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다. 대규모 어음 사기단에 걸려들어 반 년 동안 공을 들였던 신문사도 압류 당하고 집에 있는 농토마저 팔아 치워야만 했던 그 때는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할머니께서도 마음 편히 누울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결혼을 코앞에 두었던 민주도 식을 미뤄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갔던 승진의 할머니가 귀국하였다. 해마다는 아니었지만 3 년에 한 번씩, 고향 뒷산에 묻힌 자식의 제사를 지내러 한국을 다녀가곤 했던 승진 할머니 였다. 승진 할머니는 경주 할머니보다 여섯 살 손아래였지만 이미 한 고향지기라 오랜 벗이 되어 있었다. 개가도 하지 않고 손자를 데리고 살아가는 며느리가 안쓰럽다며 김제 댁 앞에 서 눈물까지 보였던 고씨였다. 승진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려면 아직도 1년이 더 남아 있는 데도 고씨는 갑자기 귀국했던 것이다. 나중에 김제 댁한테서 들어 알았지만 경주네의 망해 가는 형편을 보다못한 김제 댁 이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고씨는 그렇게 풍비박산 난 집안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다 자신 앞으로 되어 있던 임야를 선뜻 경주네에게 내놓으며 유용하게 쓰라고 했던 것이다. "나야 인자 여그 사람도 아니고 인자꺼정 우리 손주, 며느리 데리고 단맛 쓴맛 같이 본 사람들이 어려움 당하는디 보고만 있을 수도 없응께, 저 벽파진 앞산과 용장 산성 근처의 동네 뒷산을 내놓고 싶으네. 그것으로 얼마를 받을 랑가 모르겄네만 승진 에미한테서 말 들 어본께 거자 전답들도 저당잡혀 부렀다던디 우리 딸아가 미국서 돈을 쪼끔 모았는디 갸가 몇 푼 보탠거랑 같이해서 남은 빚이라도 갚어 불고 을마 안 되야도 전답떼기라도 사라고 이 라고 왔네." 고씨는 경주네에게 글썽이는 눈물을 훔치며 땅문서를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고씨 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을 경주에게 건네주며 고씨 할머니의 뜻에 어 긋나지 않도록 집안을 살려 보라고 당부하셨다. 수렁에 빠졌을 때 한 가닥 희망을 얻은 경주는 자신에게 들어온 제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날을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임야를 파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렇게 임야 를 선뜻 내 준 할머니의 땅을 팔아 이문을 취한다는 것은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 고 더욱이 경주는 더 이상 새로운 일에 손을 댄다는 것이 겁부터 났다. 경주는 그런 자신을 보면서 어음 사기 사건 이후로 스스로 많이 위축되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게 신중히 고민하던 때에 마침 우영이가 그를 찾아왔다. 우영은 삼별초의 근거지인 남도 석성과 용장 산성에 취재차 내려왔다가 경주와 함께 밤을 새면서 여러 가지 대안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우영이가 결정적인 제안을 했다. "자네 아버지도 위하고 더 크게는 고향을 위할 수 있는 일은 지역 특산물을 재배 가공하 여 알리는 것이라 생각하네. 나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직 이쪽 남부 지방은 특산품 개발이 더디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 보려는 사람도 드물어. 그래서 말인데, 여기 특 산무인 구기자를 식품으로 개발해서 시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 지 궁금하네." 우영의 말을 듣던 경주는 자신이 얼마나 고향에 대해 무지했나를 새삼 깨달았다. 애향심 만으로 고향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안 것이다. 자신보다 고향의 미래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는 우영의 안목에 경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분간 자금이 마련되지 않는 한, 그것은 구상 자체로 접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열흘 후 경주는 고씨 할머니에게 우영과 얘기했던 구기자 사업에 대한 계획을 말씀드렸 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임야를 우선 개간해서 구기자밭으로 일구어 구기자 농장을 만든 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고씨 할머니가 내 주신 것으로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주는 다음 날부터 인부들을 모아 산 개간 작업에 들어갔다. 개간 작업에 김 의원도 참 여해 경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작열하는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경주는 메리야스 바람으로 온종일 땡볕에서 나무들을 실어 나르고, 기계톱으로 자르기도 하 면서 서서히 작업을 마무리해 나갔다. 벌목 작업이 끝난 산을 바라보며 승진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밤, 아버지를 앞세우고 이 산으로 향하던 김제 댁 아주머니와 고씨 할머니의 모습이 벌거벗은 산 위로 희미하게 아른 거렸다. 승진 아버지의 죽음과 연이어 일어난 고씨 할머니의 미국행, 그리고 김제 댁 아주머니가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일들이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경주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경주는 산자락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김 의원을 바라보며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경주 에게 오는 길이었는지 걸음을 더욱 빠르게 하여 올라와 숨이 찬지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 고서야 입을 열었다. "방금 이 형 집에서 어머님하고 아주머니가 참을 내오셨어요. 이 형 찾느라 애 많이 먹었 습니다. 자, 내려갑시다." 김 의원이 먼저 그 비대한 몸을 이끌고 산자락을 향해 내려갔다. 걸리적거릴 것도 없는 산을 그는 미끄럼 타듯 내려가자 산아래 묵정밭에 이고 온 양동이를 내려놓은 어머니가 달 려오는 경주를 향해 말했다. "사람들이 다 찾았는디 어디 그라고 꼭꼭 숨어 부렀냐?" 비빔국수 사발과 나무 젓가락을 건네면서 어머니가 꾸중이라도 하듯 말했다. 경주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없이 국수 사발을 받아 들었다. 벌써 참을 다 들고 몇 그루 남지 않은 나무들 사이에 가서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도 꽤 보였다. 김제 댁이 김 의원에게 비빔국수를 더 권하자 그는 웃으면서 사발을 내밀었다. 그릇 가득 면과 양념장을 섞어 건네자 김 의원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김제 댁을 향해 말했다. "이거 너무 많은데, 그래도 국수발이 쫀득거려 배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깨끗이 비워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김 의원을 바라보며 경주가 말했다. "이거 저보다 김 의원님이 더 후대를 받는걸요? 저는 제 손으로 덜어 먹어야겠어요." 경주가 양동이 옆으로 다가서자 김제 댁이 김 의원과 똑같이 사발 가득 넘치도록 면과 양 념장을 퍼 주었다. 그릇을 거의 비워 갈 즈음, 어머니는 냉수 그릇을 경주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땡볕에 나와 일혀도 쓰겄냐? 원래 이런일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혀서 걱정이 되는구만. 니 몸이야 니가 어련히 알아서 챙기겄냐만은 그래도 조바심이 나서 하는 소링께 새겨 들어라." 경주는 물그릇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는 몸을 일으켜 인부들이 다 떠난 나무 그늘로 갔다. 김 의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 한 대를 권하자 경주는 담배를 물고서 불을 당겼다. 정말 꿀맛 같았다. 두 사람은 담배를 다 태우고서 각자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김 의원이 예전에 부렸던 중장비들을 이용해서 삽질로는 불가능한 나무 둥치들을 파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산 개간은 그런대로 모 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6월부터 시작된 개간 작업은 8월말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경주는 낮이 면 산에서 밭을 둘러쌀 나무들을 심고 밤이면 책을 펴 들었다. 그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수록 공부가 그리웠다. 경주는 가슴 깊숙이 묻어 둔 학문의 길 이 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밤이면 책을 펼쳤다. 어느 날 여에서 함께 새참을 들던 김 의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가섰다. "이것으로나마 이 형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군요. 이일로 나의 과오가 조금이라도 지워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나와서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훨씬 가볍습니다." 지난가을 개간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바로 파종에 들어갔던 구기자가 이듬해 봄이 되면서 파릇파릇하게 새순이 돋아났다. 그렇게 봄이 다시 찾아오면서 경주는 캠퍼스가 그리워졌다. 그는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자신의 망설임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그는 집에 신세지 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다른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원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만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경주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농장 일에서 완전히 손놓는 것은 아 니었지만 그는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승주에게 농장 경영을 맡기고 일보 전진하려는 심산 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학업에 대한 자신과의 약속이자 아버지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다 행히 승주가 그런 오빠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경주는 벽파진 항구에서 드높은 바다와의 맹세를 마치고, 자신을 가장 잘 따르는 백구와 함께 광주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2권에 계속